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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an 09. 2021

유년시절의 잔상으로 구축된 발터 벤야민 월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by 발터 벤야민 

유대계 독일인인 발터 벤야민(1892~1940)은 번역가, 철학자, 평론가로써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글을 남겼다. 베를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독일 낭만주의 비평개념>으로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최우등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문필가로 활동하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역사철학테제>등을 저술했다. 미완의 작품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지금까지도 많은 2차 저작을 만들어내고 있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베를린의 여러 풍경과 그에 따른 단상을 묶은 책이다. 


이 책을 집필했던 1930년대는 나치의 집권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유럽 문화와 사회의 기초가 충격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p.9) 절박한 상황에서 유년시절을 소환한 이유는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p.10)하기 위함이었다. 벤야민은 이 작품이 ‘망명지에서 생길 수 있는 일종의 면역주사’(p.10)로서 나치를 피해 망명한 독일 지식인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를 기대했지만 그의 생전에는 책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서사적 연속성을 가지지 않은,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티어가르텐’, ‘전승기념탑’, ‘불루메스호프 12번지’ 등 자신 또는 동시대 베를리너에게 친숙한 공간, ‘학급문고’, ‘반짇고리’, ‘장롱들’ 등 주변의 사물, ‘원숭이 연극’, ‘신열’, ‘여행과 귀환’ 등 자신이 경험했던 상황과 그에 따른 단상들이 펼쳐진다. 생각의 단초는 각 편의 제목과 같은 구체성에서 시작되지만 벤야민의 서술은 ‘상상력은 일단 베일을 드리우면 그 가장자리에 잔주름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법’(p. 77)이라고 말한 것 처럼 경계없이 뻗어나간다. <베를린 연대기> 또한 유년시절의 기억을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저자 자신의 다양한 사색, 특히 공간과 언어에 대한 고찰이 인상적이다. 


‘’언어’는 우리에게 기억의 저장이 과거를 탐색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거가 펼쳐지는 무대라는 것을 오해의 여지없이 가르쳐준다.’(p.191) 벤야민은 자신의 체험이 기억의 매체가 되며 죽은 도시들이 묻혀있는 땅을 파는 것 처럼 묻혀있는 자신의 과거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에 대한 그의 날선 감각은 기억속 아스라한 감성을 그대로 소환해내는 열쇠가 된다. ‘마치 장미 향수 한 방울에 수백 송이의 장미꽃잎들이 보존되어 있듯이 수백의 여름날들이 그 형태, 색채, 많은 날들을 다 바쳐서 그 안에 향기로 보존되어 있는 단어. 그것은 ‘브라우하우스베르크’이다. ….아이와 어른 언어의 경계에 놓인 이러한 단어들은, 문학적 단어와 세속적인 단어 사이의 내적 갈등으로 인해 거의 소모되어 가물가물한 입김이 되어버린 말라르메 시의 단어들과 비슷하다.’ (p.206)


디테일하게 묘사된 그의 기억들은 손에 잡힐듯 물성을 획득할것만 같다. ‘내 삶과 생명의 그래픽 공간을 지도위에 그려보겠다는 생각을 해왔다’(p.158)고 했던 그는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글로서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했다. 서사를 토대로 전달되는 이야기가 마치 영화와 같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곳만 카메라를 통해 보여준다고 한다면, 벤야민의 글은 관람자가 스스로 그 안을 보고 듣고 느낄수 있도록 구축된 무대, 마치 가상공간과 같은 세계를 이룬다. 독자는 그 안에서 ‘산책자’가 된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역사적 경험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려 했던 작가의 의도가 구현된 이 책을 통해 벤야민의 세계를 경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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