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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l 04. 2021

다정한 SF, 정세랑 월드

서평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소설집(아작, 2020)

<목소리를 드릴게요>(아작, 2020)는 2010년에서 2019년까지 10년에 걸쳐 여러 매체에서 발표된 단편소설을 모은 정세랑의 소설집이다. SF매거진 <판타스틱>에서 장르소설로 등단한 그는 순수문학의 영역에서도 호평 받고 있는 소설가다. 창비장편소설상, 한국일보문학상등을 수상했고, 등단한지 10여년 만에 11권의 소설집과 다수의 공동저서가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책은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가락을 찾아 시간여행을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불치병을 과학으로 고쳐내고 우주로 떠나게 되는 연인들이 등장하는 ’11분의 1’, 외계에서 온 거대 지렁이에 의해 변화되는 지구와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리셋’, 외계인이 만드는 모조 지구 행성에 끌려간 지구인과 천사가 빚어내는 ‘모조 지구 혁명기’, 3시간의 기억력 향상 기능을 가진 알약이 바꾼 세상을 그린 ‘리틀 베이비블루 필’, 목소리로 사람을 선동하는 능력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 대멸종 이후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스케치한 ‘7교시’, 좀비세상에서 살아남은 양궁선수의 생존기 ‘메달리스트의 좀비시대’다. 


정세랑의 소설은 SF인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탄탄한 과학적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설계된 스토리는 아니지만 상황의 묘사와 기발한 상상력은 사고 실험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뇌의 해마를 자극해 치매환자에게도 3시간 정도의 선명한 기억을 더해주는 약이 발명되었을 때 생길 법한 해프닝과 사회적 문제들이 그럴듯하게 펼쳐지기도 하고(리틀 베이비블루 필), 여섯 번째 대멸종 이후 자리 잡게 되는 환경주의적 가치관이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묘사되기도 한다(‘7교시’). 하지만 그의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속 곳곳에 포진된 ’다정함’이 아닐까? ‘마치 수용소가, 세계가 연선을 사랑해서 담뱃재조차 닿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존재, 우주의 사악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p.215, ‘목소리를 드릴게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기 위해 목소리를 버리기도 하고 우주 저 멀리 떠나기도 하는 소설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독자는 정세랑의 이야기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의 연장선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 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매년 5천 마리의 오랑우탄을 죽여 가며 팜유로 가짜 초콜릿과 라면을 만들었다.’(p.44) 자연파괴를 통한 대멸종의 시퀀스로 바뀌게 되는 생활방식을 보여줌으로서 ‘묶인 생명도 갇힌 생명도 없이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p.91)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리셋’) 정세랑의 공감은 공존과도 연결된다. 환경파괴에 대한 SF적 상상력은 여성성에 대한 작가의 방향성과 더해져 에코페미니즘적 성향을 띠게 하고 있다. 


장르적 측면에서 본다면 정세랑의 소설은 여러모로 SF적인 요소는 부족할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판타지 장르에 가깝고 극적인 측면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사건이라기보다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관계이며 여기에서 판타지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좀비가 창궐하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채 ‘그렇다 치고’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메달리스트의 좀비시대’) 장르적 구분에 관계없이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독자를 즐겁게 한다. 다시 한 번, 정세랑의 소설은 SF인가? 이미 그 질문은 유효하지 않다. 더 이상 장르적 구분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정세랑이 곧 장르’가 된 셈이다. 


사족이지만, 작가는 ‘SF작가들과 오랜 우정을 나누어 왔으므로’ 이 책을 꼭 내고 싶었다고 후기에서 밝힌다. 그리고 아마 그 이유로 SF 전문 출판사인 ‘아작’에서 책을 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강명 작가와 아작의 계약위반사건은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인세 지급 지연과 불투명한 판매량 고지 등 출판계의 부조리한 관행이 SF 장르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것일까. 과학소설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SF 전문 출판사’를 표방하기란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작에 대한 팬들의 지지는 적은 수일지 몰라도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선의를 권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부디 아작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더 성숙한 SF전문 출판사로서 성장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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