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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Mar 25. 2023

철학적 성찰을 품은 연애소설

서평 <정체성>밀란 쿤데라 (민음사, 2012)


밀란 쿤데라(1929~ )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세계적인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학을 공부하던 그는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 수업을 받으며 영화와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 체코의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이 좌절되면서 사회생활이 금지된 쿤데라는 1975년 조국을 벗어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망명 후엔 프랑스어로 집필활동을 계속하면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느림> 등을 집필했다. <정체성>(민음사, 2012)은 1998년 발표된 소설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 해체되는 정체성의 혼란을 두 남녀의 연애사건을 통해 보여준다. 


다섯 살이었던 아들을 잃은 후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인 ‘샹탈’은 연하인 ‘장마르크’와 연인관계다. 여행지에서 연인을 기다리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나이먹어감을 느끼고 부지불식중에 두려움의 감정을 장마르크에게 토로한다. 어느 날 우편함에 발신인이 없는 연애편지를 받게 된 샹탈은 누가 보낸 것인지 궁금해 하며 장마르크에게는 비밀로 한 채 주위의 남자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연인인 샹탈과 장마르크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자신보다 어린 연인이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샹탈의 막연한 예감은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눈앞에 닥친다. “그는 그녀를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당신은 늙고 나는 젊다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오랜 친구 F를 그의 삶에서 배제할 때와 마찬가지로 쉽사리 냉정하게 그녀를 떠날 것이다.”(p.105) 존재의 유한성과 나이듦에 대한 두려움은 샹탈의 자신감을 갉아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온 연애편지는 샹탈에게 열정과 활기를 선사한다.


장마르크의 ‘시라노의 연애편지’는 연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지만 그가 편지를 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샹탈은 배신감을 느낀다. 분노는 사랑의 감정을 넘어서고 급기야 샹탈은 장마르크를 떠난다. ‘두 사람 모두 사랑의 영토 위에 있을 때 강한 사람은 사실 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사랑의 영토가 그들 발밑에서 사라진다면 강한 자는 그녀고 약한 자는 그다’(p.136) 경제적 우위에 있던 샹탈은 이제 떠날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과연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정체성은 흔들림 없는 확실한 무엇인가?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장마르크에게는 모르는 여자의 모습을 한 샹탈이 꿈에까지 등장하고, 연애편지의 주인공을 탐색하는 샹탈은 누군지 모를 남자를 위해 자신의 취향도 아닌 빨간 잠옷을 사서 입는다. 타인에 의해 흔들리는 정체성은 과연 처음부터 ‘내 것’으로 존재 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런던으로 떠나는 샹탈과 그녀를 쫒는 장마르크의 여정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아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투영한다. ‘그녀는 알몸인데도 저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벗기려 드는 거다! 그녀의 자아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것! 그녀의 운명으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것이다!’ (p.177)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 중의 하나인 사랑을 통해 쿤데라는 불확실한 자아에 대한 성찰을 길지 않은 소설 속에 담았다. 타인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획득되는 자아는 역시 타인에 의해 흔들리고 의심받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은근슬쩍 드러나는 ‘나’의 존재는 소설의 시점을 바꾸며 순식간에 독자를 버즈 아이 뷰(Bird’s eye view)로 사건을 조망하게 한다. 작가의 적극적인 소설 속으로의 개입은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몽상의 경계를 흐리며 정체성에 대한 물음표를 독자에게 던진다. 연애소설의 구조에 철학적 성찰을 품은 이 작품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오는 정체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년 여성의 성적 판타지에 대한 작가의 편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무겁지 않은 사랑 이야기에 존재의 철학적 질문을 입혀낸 작가의 필력은 그의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2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길이 또한 독자의 부담을 덜어주니, 밀란 쿤데라를 탐험하는 첫 여정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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