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1)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p.73)
아니 에르노(1940~)는 자신이 경험한 사실만을 정확하고 엄격하게 재현하는 글쓰기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다. 노동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노르망디에서 성장한 그는 루앙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문학교수 자격을 획득한 그는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장롱>으로 데뷔했으며 <남자의 자리>(1984), <세월>(2004), <삶을 쓰다>(2011)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고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 갈리마르에서 출판된 소설 <단순한 열정>은 동구 출신 연하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문학교수의 내면을 기록해 소재의 파격과 사실성으로 그해 프랑스 최고의 화제작이 된다.
주인공인 ‘나’는 A를 사랑하는 일에 열중했던 일을 회상한다. 모든 일상은 그에게 종속되고 나의 관심을 끄는 일은 오로지 그에게 관련된 것뿐이었다. 즐겨 듣던 클래식은 대중음악으로 바뀌고 생전 처음 포르노 영화를 보기도 하는 등 사랑의 열정은 나의 일상을 뒤흔든다. 스스로에 대한 관념은 타인인 A에 의해 무너지고 본인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소설은 사실이나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낸 문학 장르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 소설이라는 구분 짓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소설적 허구’에 대한 그의 태도에 있다. 에르노는 “체험하지 않은 허구는 쓰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예민하게 분석한다. 작가는 책을 통해 사랑에 빠진 상태인 자신의 내면과 사고의 흐름을 미화하거나 사회적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정확한 글쓰기로 표현한다. 이런 에르노의 글을 접한 독자들은 그의 솔직함과 대담함에 당황스러움까지도 느낄 수 있다.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p.50) 작가는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갖게 되는 열정과 때로 수반되는 상실에 의해 무너지는 자아조차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메스를 들이대는 듯한 글을 쓴다.
작가 본인과 그 주변인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때로 재현의 윤리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타인의 삶을 여과 없이 새겨 넣을 때 작품은 대상이 된 사람의 일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가 새겨 넣은 것은 타인의 흔적이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가깝다.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나 등장인물의 묘사가 아닌 의식의 흐름을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독자는 스토리가 아닌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통해 사랑의 열정과 고통에서 오는 감정을 함께 나눈다.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씌어지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터이고...(중략) 남들이 읽기 전에 내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 놓고 솔직하게 이 글을 쓸 수가 있다.”(p.38) 어쩌면 문학이란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을 통과한 후 우리에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채 1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그 안에 스민 작가의 흔적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의 태도와 방식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