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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은 인생이 아닌, 인생 같은 소설

<세월> 아니 에르노 (2023, 1984books)

by 엄마오리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 있게, 임상적 예리함으로 탐구”함으로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1940~ )는 자신이 경험한 사실만을 정확하고 엄격하게 글로 옮기기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다. 1974년 소설 <빈 장롱>으로 등단한 그는 <단순한 열정>, <탐닉>, <사건>, <집착> 등 많은 작품에서 예리하며 정확한 묘사의 자전적인 글쓰기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즈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등을 수상한 소설 <세월>은 1941년 전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시작해 2006년 작가의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적 서사와 전후 현대사를 어우르는 한 편의 거대한 역사화(歷史畵)를 그려낸다.


소설은 작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프랑스 이브토의 전쟁 후 풍경과 다양한 장면들의 묘사로 시작된다. 맥락 없이 분절된 각각의 단락은 스케치하듯 표현된다. 전쟁 후 배고픔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시작된 개인의 역사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거쳐 풍요로운 소비중심의 중산층을 지향하는 장년기로 접어든다. 시라크와 미테랑, 사르코지 대통령을 거쳐 가며 격랑하는 현대사와 개인의 미시사가 만난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p.238) 작가는 ‘영광의 30년’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경제호황기와 68혁명이 개인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라크와 미국의 충돌로 드러나는 ‘국제 사회의 새로운 질서’는 90년대를 ‘환멸의 시대’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에르노는 자신이 살아낸 시간들을 역사적인 흐름 속에 촘촘히 박아 넣어 현대사를 재구성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대에 이 땅 위에 살다간 그녀의 행적을 이루고 있는 기간이 아니라 그녀를 관통한 그 시간,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는 그 세상이다.”(p.318) 장이나 챕터의 구성없이 시간 순으로 나열된 사건들은 한 사람의 일생 또한 맺힘 없는 시간의 연장선 안에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극적인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건조한 문체로 담담하게 써 내려간 아니 에르노식 ‘자서전’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갈음되기보다는 그 시간들을 살아내고 견뎌낸 연속성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글쓰기는 작품 안에서 종종 ‘나’라는 주어로 서술을 이끌어가지만 이 작품은 ‘그녀’라는 3인칭 단수를 사용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나’라는 단어가 주는, ‘너무나 확고부동해 편협하’게 까지 느껴지는 무언가를 멀리하기 위해 작가는 ‘그녀’라는 단어를 선택하지만, 그조차도 ‘너무 많은 외재성과 거리감’이 있다며 탐색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획득된 객관성과 거리두기는 시종일관 감상적(感傷的) 노스탤지어를 경계하며 공동의 시간을 재구성한다. “그녀가 일종의 비개인적인 자서전으로 보는 이 글에는 어떤 ”나“도 없다-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사람들“과 ”우리“가 있다”(p.321) 에르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이 작품을 통해 ‘완성’한다.


현대사라는 날실과 개인사의 씨실을 엮어 빚어낸 이 작품은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 개인이 통과했던 ‘세월’을 넘어 전쟁 이후 지금까지 프랑스 근대사를 조망한 기록물이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정치적 이슈들, 당시에 유행했던 문화적 특징들에 대한 서술이 많기 때문에 독해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인생의 고비고비를 지나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변화하는 세상을 통과하며 풀어낸 통찰만은 돋보인다. ‘모든 장면은 사라질 것’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잊혀져가겠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하는’ 행위, 즉 글쓰기와 읽기를 통해 연결되고 계속될 것이다. ‘소설 같은 인생’이라는 흔한 비유가 있지만, 아니 에르노의 이 작품은 ‘인생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에르노의 작품을 접했던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그의 세계를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또 다른 성찰을 원하는 독자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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