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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타래 May 18. 2020

매주 월, 목 아침 8시마다 오는 메일

띠링.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역시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 8시만 되면 동일한 제목에 날짜만 바뀌어서 메일이 온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부서원 전체가 같은 메일을 받는다. 메일 내용에는 온갖 그래프가 그려져 있다. 팀장님이나 부장님이 보낸 것이 아니다. 발신인에는 내 이름이 적혀있다. 하지만 나는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교대근무라서 야간이나 오후 근무이면 아침 8시에 출근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지?


사실 이 메일은 엄밀하게 따지면 내가 보낸게 맞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발송한 메일은 아니다. 시스템에서 매주 월, 목 아침 8시마다 현황을 자동으로 분석해서 시각화 한 메일을 보낸 것이다. 그럼 왜 발신인이 나로 되어 있을까? 바로 내가 이 메일 자동화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귀찮음이라는 이름의 시작


부서 배치를 받고 약 3개월이 지난 후부터 개인 업무가 생겼다. 각 설비에서 발생하는 에러들을 종합해서 분석하는 업무였다. 그 당시에는 설비가 여섯 대만 있었고 물량도 많지 않아서 금방 할 수 있었다. 다만 좀 귀찮은게 에러들이 올라오는 시스템에서 엑셀 파일로 Raw data를 받은 다음 피벗테이블로 각 설비별 에러를 종합한 후 다시 설비군별로 나누고 그 데이터를 가지고 하나씩 일일이 그래프를 그렸다. 여기까지 해야 간신히 시각화였고 분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았지만 설비 대수가 많지 않아서 금방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설비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차츰 설비의 수가 늘어나서 시간이 조금씩 걸리다가 천안으로 모든 설비가 모이자 설비 군별로 분류해도 6개 분류, 총 설비 대수는 22대나 되었다. 처음보다 4배가 조금 안되게 늘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데이터를 정제하고 분류해서 그래프를 그렸다. 점점 이 업무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래프를 그리는 것 만이라도 자동으로 딱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시각화 도구에 눈을 뜨다.


먼저 주변에 자동으로 그래프를 그리는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다. 몇명이 조언을 해주었지만 언제나 데이터 형태가 고정이 되어 있고 내용만 바뀌는 상태일 때만 가능했다. 예를 들면 5개 매장들의 월별 매출 같은 형식이다. 1년에 월은 12개이고 5개의 매장이라고 했으니 12 X 5 의 형태가 고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설비의 에러들은 특정 에러가 나는 주도 있고 나지 않는 주도 있기 때문에 피벗테이블을 하면 세로축의 개수가 매번 바뀌어서 결국 다시 일일이 그래프를 그려야했다.


그러던 중 신입사원 대상으로 시스템 교육을 들었는데 사내에서 Spotfire라는 시각화 도구에 대해 배웠다. 데이터가 행렬 형식으로 정제만 되어 있고 미리 원하는 템플렛으로 그래프를 정해 두면 자동으로 그래프를 그려주는 시각화 도구였다. 획기적이었다. 다음날 부서에 와서 템플렛을 만들기 시작했고 몇 번의 수정을 거쳐서 그래프를 자동으로 그리게 되었다. 그래서 기존 업무 시간보다 절반 이상이 줄어들었고 그만큼 나도 편해졌다.


한번 줄이기 시작하니까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Raw data가 시스템에 저장이 되니 Spotfire로 자동으로 데이터를 넘겨줘서 90%이상 자동화하고 싶어졌다.



시스템의 숲을 헤쳐서 얻은 100% 자동화


그때부터 사내 시스템을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화성 사업장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많고 분명히 나같이 반복작업을 귀찮아하는 명석한 사람들이 먼저 구현을 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스템들이 모여 있는 클라우드 서버에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시스템들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Spotfire라는 시각화 도구를 알았을 때 처럼 누군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시스템인 듯 해서 알아봤는데 뭔가가 부족했고, 저 시스템인 듯 했는데 기능이 없었다. 찾다 쉬었다 찾다 쉬었다를 1년 정도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Spotfire Q&A 게시판에서 Publisher 권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내 프로그램과 연동을 해서 자동으로 데이터를 가져와 메일링 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래서 사내 프로그램을 확인했고, 설비 에러들이 모여있는 클라우드로 접속해서 자동으로 데이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후 내가 원하는 형태로 데이터를 가져오게 수정을 한 후 권한을 획득했다. 


약 1년 반의 시간을 거쳐 설비 에러 분석을 100% 자동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자동으로 그려진 그래프들을 통해 순수하게 현황을 파악하고 원인을 분석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5~6시간의 업무를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귀찮음은 필요의 어머니


내 단점 중 하나는 귀차니즘이다. 이게 귀찮음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것 보다 집 안에 있는 걸 좋아하고 일을 할 때도 빠릿빠릿하게 하지 못한다. 특히 반복 작업은 최악이다.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반복적으로 같은 일이나 동작을 해야 한다면 너무 끔찍하다. 설비 에러 분석을 위한 종합 업무가 딱 이런 분류였다. 분석을 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서 버겁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업무를 자동화 해버렸다. 그러니까 내 시간도 늘어나고 아낀 에너지와 시간을 더 부가가치가 높은 업무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 시작도 귀찮음이었다. 내 단점이 장점이기도 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업무다. 하지만 우리 부서에 나만큼 귀찮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자동화를 할 생각을 했다. 만약에 내가 그 자동화 프로그램과 함께 다른 부서로 가 버려서 매주 월, 목 아침 8시마다 오는 설비 에러 현황 메일이 오지 않게 된다면 누군가는 다시 엑셀로 Raw Data를 받아서 일일이 분류하고 정제한 다음 그래프를 그리고 그렇게 5~6시간이 지난 후에나 분석을 시작하겠지. 그 사람은 나처럼 자동화 할 생각을 할까? 생각을 해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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