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하늘에서 왔지만, 사람들 속에서 이어졌다
내가 그 이름을 처음 본 건 오래된 두루마리에서였다. 그것은 먼지와 시간의 무게를 이겨낸 조용한 기록이었다. 내가 살던 안디옥에서는 이런 유대인의 족보를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나는 이름들에 끌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알고 싶었다. 그의 뿌리 말이다.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리아의 태를 빌어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세례자 요한에게 물을 받던 그 장면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하늘에서 들었다는 말도 들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로 그를 설명했다. 어떤 이는 눈빛을 말했다. 어떤 이는 손끝의 따스함을 말했다. 어떤 이는 그의 침묵을 기억했고, 또 다른 이는 그가 했다는 말을 조심스레 되뇌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요셉. 헬리. 맛닷. 레위. 멜기. 얀나이… 그리고 나단. 다윗.
이름들이 내 앞에 차례로 늘어섰다. 이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침묵은 꽤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누군가는 왕이었고, 누군가는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선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름 없이 사라졌고, 또 누군가는 역사의 어두운 틈 사이에서 조용히 살아냈다.
나는 마태라는 다른 기록자의 족보도 접한 적이 있다. 처음엔 단순히 비교하기 위해 들여다보았고, 곧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알디엘, 스룹바벨… 그 둘은 내 기록과 겹쳤다. 단 두 사람이었다.
흥미로웠다. 이들은 나라가 무너진 후에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살아갔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무너진 성전, 사라진 왕위, 포로로 끌려갔던 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 어쩌면 그들의 이름이 두 계보에 함께 남은 건, 하느님이 그 희망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머지 이름들은 하나같이 달랐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다. 유대인이라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쓸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시작이었고, 조상이었고, 하느님과의 약속이 연결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들의 계보를 따라 족보를 엮었다. 번영의 역사, 권력의 역사, 패배와 회복이 얽힌 왕권의 흐름이었다. 마태는 아마 그들을 통해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의 언어로.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피로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내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라기보다는 연구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 민족의 관습과 경전, 그들이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을 배우는 사람에 가까웠다. 처음엔 이해하려 애썼고, 곧 감탄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이야기가 한 사람에게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 나는 그를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내가 본 예수는, 단지 유대인의 왕이 아니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말속에는 인종도, 경계도, 국경도 없었다. 그는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건넜고, 그들의 마음을 바꾸었다. 그런 그를 설명하는 족보는, 단지 유대 민족의 틀 안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족보의 끝을, 아니, 시작을 다르게 잡았다. 나는 요셉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다윗도 지나고, 아브라함도 지나고, 노아도 넘어서서, 셋을 지나 아담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마지막엔—아니, 처음엔—하느님을 썼다.
나는 그가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사실, 두려웠다. 이런 방식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유대인 독자들이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지. 내가 만난 로마 시민들이, 헬라 철학에 익숙한 이방인들이 이 이름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족보를 적었다. 왜냐면...
나는 그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민족의 신앙이나 전통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더 넓은 이야기, 인간 전체를 향한 이야기, 뿌리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가능성. 그걸 말하고 싶었다.
예수를 기록한다는 건, 어쩌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나는 그 다리를, 이름들로 만들고 싶었다. 이름 속의 시간, 이름 속의 상처, 이름 속의 기다림. 그 이름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그에게 닿게 될 것이다. 이 족보는... 사실 어색하다. 글의 흐름이 멈춘다. 그전에 예수는 요한에게 물을 받고, 하늘이 열리는 장면이 있었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 족보가 나온다. 마치 정지화면처럼.
그런데 그게 나였다. 나는 그 장면이 멈추기를 바랐다. 왜냐면... 나는 그가 누구인지, 깊이 있게 묻고 싶었으니까.
하늘이 열리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감동했지만, 나는 그 순간보다 그 뿌리가 궁금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그의 시작이 어디인지, 그가 인간으로서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지... 나는 거기에 집중했다.
사람들은 예수를 하늘의 존재로만 기억하려 한다. 신비와 기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우리처럼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관계 맺으며 살아낸 존재였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의 존재는 땅에 닿아 있었고, 사람의 피를 지녔으며, 수많은 이름들과 연결된 사람이었다.
나단, 다윗, 이새… 이 이름들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왕이 되었지만, 가장 조용한 순간에 가장 큰 실수를 했다. 그 이후, 나단이 그에게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나단이 예언자라고 불렀지만, 내가 주목한 건 그의 말보다 그의 선택이었다. 그는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의 또 다른 아들 나단의 계열을 따라 예수의 족보를 이었다. 어쩌면… 조용한 사람을 통해 이어진 계보라는 점에서, 나는 그 이름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힘과 권위로 이어지는 계보에 익숙하지만, 나는 작고 잊힌 이름들이 말해주는 가치를 믿는다. 그 이름들이 쌓여 예수가 태어났다. 한 명, 한 명의 인생이 이 사람에게 닿아 있다. 그 이름들 사이에는 실패도 있고, 유배도 있고, 잊힌 날들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이름들을 지나쳐 지금 이 이름에 이르렀다.
예수.
나는 이 족보를 그냥 이름의 목록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위대한 인물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방식이었다.
우리도 그 이름들 중 하나일 수 있다.
나, 누가.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이야기 속 이름이 될지 모른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작은 이름. 그렇지만 그 이름이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3:23b-38"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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