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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8 - 세상을 바꾸는 건 큰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날, 작고 낮은 목소리 하나가 모두를 멈추게 했다

by 나그네 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한 어르신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날도, 안식일이었다오.”


나는 그 조용한 시작이 좋았다. 대단한 증언처럼 들리지 않아서 좋았다. 삶이 걸린 회상은 오히려 조용했으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나사렛에서 밀려나듯 내려온 이후, 그가 향한 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도시, 가버나움이었다고 한다.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요즘 말로 하면 ‘무역의 도시’고, ‘사람들의 만남이 잦은 곳’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분은 그곳으로 향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듣도록. 아니, 그저 누군가라도 그의 말을 들어주길 바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가버나움에도 회당은 있었다. 안식일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늘 같은 사람, 늘 같은 목소리. 랍비들이 율법서를 펴고, 지난주에 나눴던 해석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곤 했다. 변화는 없었지만, 안식일이란 그런 거라며 사람들은 당연히 여겼다.


그런데, 그날 회당에서의 분위기는 달랐다고 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율법서를 펼치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더 이상한 건 그의 목소리였다고 했다.


“그 사람, 말이다... 마치 그 말이, 우리 속을 알고 있었소. 어디서 들은 말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뚫고 지나가는 소리였소.”


그렇게 말한 중년 남성은 잠시 말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근데 말이다… 그게, 무서운 게 아니었소. 이상하게, 편안했소.”


어쩌면 그건 권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책을 읽고, 그 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 자체가 살아서 걸어 들어온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의 가르침은 뭔가 달랐다. 복잡한 표현도 아니었고, 대단한 인용도 없었다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고 했다.


회당의 공기는 정적이었다. 단 한 사람의 말이, 모두를 조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자렛 예수!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낸 거룩한 분이야!”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회당에 늘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그는 그 도시에서 ‘그냥 좀 이상한 사람’ 정도로 여겨졌던 이였지만, 그날만큼은 전혀 달랐다.


“그의 눈빛이 달랐소. 마치 우리 중 누군가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안에 있는 것처럼...”


그 말은 무서웠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예수라는 사람은 놀라지도 않았고, 뒷걸음질도 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정적이 다시 찾아왔고, 곧 요란한 몸부림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얼어붙은 채 그 장면을 보았다. 바닥에 넘어지는 소리, 짐승처럼 내지르는 괴성,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그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상처 하나 없었다고 한다.


“기이했지요. 그렇게 격렬했는데… 멀쩡하더이다.”


그 자리에 있던 노인의 말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본 장면을 수십 번 되뇌듯 천천히 말했다.

“그 사람은, 말 한마디로 어둠을 몰아냈소. 마치... 자기 안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그날 이후, 가버나움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말로 귀신을 쫓아낸다더라.’

‘그는 단지 병 고치는 자가 아니라, 어둠을 다스리는 자다.’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를 떠돌며 자랐다. 흥미가 생긴 이들이 모였고, 필요가 있는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누구는 지인에게 들었다 했고, 누구는 직접 보았다 말했다. 어느새 가버나움은 조용한 마을이 아니라, 기대와 소문으로 뒤섞인 마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소문이 단지 기이한 이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중얼거렸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말 한마디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지 않았나? 옛 선지자가…”


그는 말끝을 흐렸지만, 그 말이 품고 있는 예감은 강했다. 누군가는 기억해 냈다. 이사야가 전하던 그 ‘은혜의 해’ 말이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억눌린 자에게 희년을 선포하던 그 말씀. 그날 그 회당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라는 걸,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 해를 선포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로 어둠을 걷어내고, 눌려 있던 자를 해방시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축귀(逐鬼 - 귀신을 쫓는 것)는 단지 영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무엇인가 터져 나오듯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그 소문이 퍼져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마른땅에 불이 번지듯, 가버나움에서 시작된 그 말 한마디는 이웃 마을, 그다음 마을로 번졌다. 어둠을 밀어내는 누군가가 왔다고. 이제는 무너진 세계 위에 하느님의 은혜가 머물기 시작했다고.






그날 해가 기울 무렵, 예수는 조용히 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시몬이라는 어부의 집이었다. 사람들은 아직 그가 그 유명한 제자가 되기 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냥 평범한 어부였고, 그날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있었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분이요… 그냥 곁에 섰다오. 그리고 열이 떠나가라 했소.”


그 말을 듣고, 나는 한 노파에게 물었다.

“정말로, 말만 하셨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말만... 그런데, 그 말이 살았소.”


그날 시몬의 집은 조용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모가 병상에 누워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으니까다. 오가는 말도 조심스러웠고, 발소리조차 조심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말했다.


“예수님, 혹시... 우리 장모님도...”


그 말에 예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부인의 곁에 섰다고 했다. 아무 기도도 없었다. 무슨 주문도, 긴 제스처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단지 그녀 곁에 서서 말했다고 한다.


“열이여, 물러가라.”


그리고 그다음 장면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분이 돌아서기도 전에, 장모님이 일어나셨소. 일어나더니... 우리한테 밥을 해주셨다오.”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여든을 넘긴 시몬의 먼 친척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의 밥상까지 기억하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요... 그냥 병이 낫는 게 아니었소. 그분은, 그 여인에게 다시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신 것 같았소.”


그 말이 내게 크게 와닿았다. 병을 고친다는 건 단지 육체의 회복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움직이고, 다시 돌보고, 다시 사람을 맞이했다.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삶은 그런 거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차리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몸을 움직이는 것.


그녀는 그날, 다시 그 모든 일들을 시작했다.






그러나 밤은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해가 지자,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병을 앓는 사람, 며칠째 말을 잃은 아이, 눈이 뒤집힌 사내, 뼈만 남은 노파까지... 모두가 그 집으로 향했다. 그들이 바란 건 단 하나였다.


“혹시 그분이, 나도 보아주실까…”


누군가는 한 발짝 앞에 있었고, 누군가는 멀찍이서 얼굴도 못 들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 밤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었다. 이름을 묻지 않았고, 사연을 따지지 않았다. 그저 병든 이에게 손을 얹고, 괴로움 속에 있는 자에게 눈을 맞췄다. 그리고 또다시 이상한 장면이 펼쳐졌다. 귀신 들린 사람들이 외쳤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입을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듣는 이들에겐 이상했을 것이다. 그렇게도 놀라운 일을 하면서, 왜 정작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못하게 했을까. 왜 그토록 숨기려 했을까. 하지만 나는 생각해 본다. 그분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건, 자신의 정체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기보다, 그들의 삶을 일으키고 싶었던 분. 하느님의 일, 그 일을 위해 왔다고 생각했던 사람.


날이 밝자, 그는 사라졌다. 그저 조용히, 말도 없이, 한적한 곳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병이 나은 이들도, 고침 받은 자들의 가족도, 단지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조차 그를 붙들었다.


“부디, 여기 계셔 주십시오. 떠나지 마세요.”


그들의 바람은 이해된다. 삶을 바꿔줄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희망이니까.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떠나려고 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하오. 그 일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는 그 말을 하고, 길을 떠났다. 아무리 사람들이 매달려도, 그의 걸음은 머물지 않았다. 왜일까.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피곤해서?


아니었다. 그는 그냥, 한 곳에만 머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열린 사람이었고, 모든 도시를 향해 열린 마음이었다. 고침 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아직 듣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그는 가야만 했다.


그날 이후, 예수는 유다 여러 지역의 회당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를 ‘의사’라고도 불렀고, ‘예언자’라 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위험한 사람’이라며 두려워했고, 어떤 이는 ‘기적의 사람’이라며 동경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이야기 속의 그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귀 기울였던 사람이었다. 귀신을 쫓아냈던 것도, 병을 고쳤던 것도, 다만 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사람을 보고, 그 안의 어둠을 보고, 또 그들에게 다시 걸어갈 힘을 건넸다. 그리고 그 힘은, 권위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의 진실함에서 나왔다.


그의 말은, 듣는 이의 심장을 뚫고 지나갔고, 귀신조차 그 앞에 침묵했으며, 병든 몸도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나는 확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걸었는지... 그걸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분은 ‘살려내는 말’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도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아무리 어두운 밤에도, 그 말은 길을 밝혀준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가는 길,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버나움의 그날 밤, 달은 꽤 밝았다고들 말했다. 그 빛 아래에서 사람들은 하나둘, 다시 삶으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가족을 안았고, 누군가는 다시 걷는 연습을 했고, 또 누군가는 삶을 놓으려다 다시 붙잡았다.


나, 누가는 그들을 바라본다. 한 줄 한 줄, 누군가의 증언 속 진실을 따라 걷고 있다. 내가 예수를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이들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믿고 싶다. 그 말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그리고 누군가가 그 말을 따라, 다시 일어선다고.


그분은 단지 놀라운 사람이 아니라, 어둠 속에 길을 만든 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길의 흔적을 따라 글을 쓴다.


누가 그러더군요.
그 말 한마디가, 사람 하나를 살렸다고.
그 말 한마디가, 내 삶도 바꿨다고 했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4:31-44"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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