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Day 17 - 희년(禧年)은 누구의 것인가

가장 원했지만, 가장 놓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by 나그네 한

내가 그 마을을 찾은 건 오래된 여행 중 하나였다. 갈릴리 북쪽 산등성이, 바람이 휘돌고 지나가는 돌담 옆 골목, 낮게 엎드린 지붕들 사이로 어린아이들의 웃음이 가끔씩 피어올랐다. 그 마을은 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나사렛. 그가 자라난 곳.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셈이었다. 그의 길을 따라 걷는 건 한 사람을 파고드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조용히 더듬는 일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말하려 들지 않았다.

“그날은… 복잡했지요.”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누군가는 멀리 산을 바라보며 말을 삼켰다. 나는 회당이 있었던 언덕 쪽으로 발을 옮겼다. 발아래 풍경은 오래된 지도를 펼쳐둔 듯 낯설고 또 익숙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회당 안에서 벌어진 그 짧고도 뜨거운 순간을.


그는 안식일이 되자 회당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가 낭독을 자청한 것도 아니고, 누가 그를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었다. 두루마리를 받았고, 펼쳤고, 그 자리에서 읽었다.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하느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하느님의 은총의 해를 알리도록 나를 보내셨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회당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고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정적이 흘렀고, 누군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했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그러나 손에 닿지 않던 약속이 지금 이루어진다는 선언. 바로 그 자리, 바로 그 마을, 바로 그 사람에게서.


그는 말을 이었다.


“이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놀랐다. 한동안 회당은 감탄으로 가득 찼다.


“저 사람, 요셉의 아들 아니야?”
“맞아, 우리 동네에서 자라난 그 애야.”
“어쩌다 저렇게 되었지?”


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그 안엔 미묘한 기류가 숨어 있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아무리 능력이 있어 보여도, 우리 중 하나가 그렇게 된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너무 익숙했고, 너무 평범했으며, 너무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나는 회당에 함께 있었다던 한 여인을 찾아갔다. 그녀는 그날을 떠올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 우린 믿었어요. 그가 우리를 해방시켜 줄 사람이라고. 로마의 발밑에서 벗어나게 해 줄 사람.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 말이에요.”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은혜의 해’라고 했잖아요. 우린 그 말을 들은 순간 알아차렸죠. 그게 바로 희년이란 걸.”


희년. 단어 하나가 내 머릿속에서 울렸다.


희년은 단순한 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오랜 꿈이었다. 49년마다 찾아오는 특별한 해. 그 해에는 모든 빚이 탕감되고, 잃어버린 땅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며, 억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는다. 가족을 잃은 이들은 다시 만났고, 뿔뿔이 흩어진 공동체가 다시 하나로 모였다. 하느님의 질서가 회복되는 해. 바로 그 약속의 해였다.


사람들은 그가 그 희년을 시작하러 왔다고 믿었다.

그것도 ‘지금’ 그리고 ‘여기서.’


그러나 그는 곧이어,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엘리야 시대에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하느님은 그 가운데 누구도 돕지 않으시고 시돈의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셨습니다. 또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지만,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회당은 숨을 죽였다고 했다. 정적은 감탄과는 다른 것이었다. 얼굴에서 피가 가셨고,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들이 꿈꾼 희년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이 땅, 이 백성, 이 민족을 위한 해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희년이 이방인에게 먼저 주어졌다고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 순간, 우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아니, 더 정확히는… 우리가 속았다는 느낌이었죠.”


나는 또 다른 노인을 만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엔 모두 조용했어요. 하지만 그 정적은 곧 폭풍 전야 같은 느낌이었죠. 누군가 벌떡 일어났고, 고함이 터졌습니다."


‘너무하다.’
‘우릴 무시하는 거냐?’
‘감히 네가 이방인을 먼저 말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죠.”


그는 떨리는 손으로 두 손바닥을 비볐다.


“회당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그를 언덕 끝까지 몰고 갔어요. 우리가 어릴 때 뛰놀던 그 절벽 말이에요. 깊은 낭떠러지. 사람이 떨어지면 다시는 못 올라올 곳. 정말 그를 떨어뜨릴 뻔했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사람들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그러나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을 그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그가 우리 사이를 뚫고 나갔어요. 어떻게 지나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자기 길을 갔죠. 뒤도 안 돌아보고.”


그 노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마지막엔 바람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나는 그 언덕 아래에 앉아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가 전한 희년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이, 억눌린 이, 묶인 자, 눈먼 자가 누구든, 그를 통해 자유를 얻는 시간.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느님은 사람을 다시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


그는 그 길을 걸어갔다. 사람들의 기대를 거슬러, 그러나 진실을 좇아. 그리하여 그는 외면당했지만, 그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그 문을 닫아버렸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다시 듣는 이라면 그 문을 다시 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율법을 어릴 적부터 배우지도 않았고, 절기나 전통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사람—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처음 그의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를 신처럼 믿는 이들보다, 오히려 그에 대해 말끝을 흐리던 사람들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어떤 이들은 침묵했고,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게 웃었으며, 어떤 이들은 외면했다.

그는 무엇을 했기에 그런 반응을 남긴 걸까?


그래서 나는 길을 떠났다. 그의 흔적을 찾아 사람들을 만났고, 마을을 돌아다녔고, 때로는 며칠을 기다려 겨우 한 사람의 기억을 들었다. 말을 아끼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면 분위기는 자주 바뀌곤 했다. 그들은 나를 경계했고, 어떤 이는 정중했지만 냉담했다.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적는다고 해서, 누가 알아줄까요?”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읽으려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내가 감히 이 이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가—그가 전한 그 ‘은혜의 해’가—처음부터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누구든 자유로워지길 원하였다.

종교나 출신, 경계선 따위는 그의 눈앞에서 무력했다.


그는 말로만 해방을 전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말도 섞지 않던 이방 여인의 집에 들어갔고, 정죄받은 자들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는, 우리가 닿을 수 없다고 느꼈던 자리에 먼저 내려왔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이 이야기를 쓴다.


내가 본 것을 쓴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은 진실을 따라가며 쓴다. 내가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눈빛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희년을 선포하였고, 그 말에 분노한 자들의 사이를 조용히 지나,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 길 뒤를 천천히 따라 걷고 있다.


그를 따라 걷는다는 건 나 역시 자주 외로워지고, 때로는 어울리지 못한 채 조용히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렇게 걸으면서, 나는 오히려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은혜는…

당신이 누군지 묻지 않고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따지지 않고 당신이 앉을자리를 조용히 내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보여준 희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믿는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기를.

닫힌 마음에도, 아주 작게 문이 열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안으로, 아주 조용히 빛이 스며들 수 있기를.


“그가 걸었던 그 길 끝에서, 나도 여전히 조용히 귀 기울이며 서 있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4:16-30"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누가복음각색 #예수의고향나사렛 #희년의선포 #나사렛회당사건 #예수의말씀 #은혜의해 #이방인을위한복음 #거절당한예수 #누가복음4장 #복음의경계넘기 #성경묵상글 #성경문학각색 #예수의이야기 #낯익은사람의거절 #믿음의경계 #묵상에세이 #이방인의시선 #누가의시선 #조용한복음의길 #고향에서배척받은예수 #예수를따라걷는길 #은혜는경계를넘는다 #희년의진짜의미 #닫힌문을여는빛 #예수의길끝에서 #묵묵히귀기울이며 #복음은열려있다 #종교를넘은자유 #믿음의조용한흔적


keyword
이전 16화Day 16 - 사십일의 질문, 말 없는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