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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그네 한 Apr 06. 2022

이집트의 '히브리인'

이집트에서 '히브리'라 불렸던 사람들의 이야기

1. 역사의 기억


  사람들은 각자 역사의 기억을 가지며 산다. 우리 역시 인생 가운데 우리들만의 역사가 있으며 많은 것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지난 우리의 역사를 보며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한다. 크게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어느 지역 출신, 어느 학교, 교회 출신 등등.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기반으로 우리들만의 세계관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성경의 주인공이 되는 민족, 이스라엘의 기억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일까? '구약성서 이해’의 저자 버나드 앤더슨은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기원을 출애굽 사건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예언서 본문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고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도 출애굽 시점이었다고 생각하였다(예. 호 11:1; 13:4; 겔 20:5-6; 시편 81:9-11 등).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살던 그 시절에서 몇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출애굽 당시 살았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무엇인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역사도 추적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과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들에게 있어서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통용되었던 ‘히브리인(창 14:13; 출 2:11)’이라는 자신들의 역사는 무엇을 뜻하였을까? 그들은 자신의 조상들의 무엇을 기억하며 살았을까?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기억. 오래전 자신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총리 요셉의 기억들... 아주 희미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대대로 구전으로 전해져서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사는 그 시점에도 자신들의 오래된 뿌리를 찾으려 노력했을 수 있다. 그래서 난 이곳을 빌려 이집트에서의 '히브리인들'의 삶과 모습을 조금 들여다보고 싶다.






2. 사람들의 시선 “히브리 사람”


채색옷을 입고 이집트에 방문한 히브리인들 - 알민야 베니 하산 귀족 무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지는 ‘별명’이 있다. 그리고 그 ‘별명’은 대부분 그 사람의 특징을 묘사한다. 하지만, ‘별명’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을 놀리거나 비하하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별명은 한 사람, 집단 크게는 한 민족의 특징을 잘 묘사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인들에게도 그들을 특정 짖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것은 ‘히브리 사람’이라는 표현(별명?)이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창 14:13에서 처음 ‘소돔 사람’이 아브라함을 칭해서 한 말이다.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으로 칭해졌다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 자신들을 가리켜 사용하던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외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인들에 대하여 사용하던 호칭이었기 때문이다(고든 웬함 - 창세기). ‘히브리’라는 표현은 사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칭해서 하는 표현이었다. 즉, 이방인, 나그네를 칭한 표현이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히브리 사람’이라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뜻은 부정적 이미지를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변 국가의 시선으로는 ‘이방민족’. 더 나아가 애굽에서는 ‘외국인 노예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한 오랜 시선은 ‘나그네’이며 ‘노예’였다.


  실제로 그들의 조상은 민족이라 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변변한 땅도 없었으며 사람들도 없었다. 그들은 유목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돌이처럼 아브라함을 따라다녔던 조카 룻은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소돔 땅은 더할 없는 만족을 느꼈을 것이다(창 13:10). 그들은 떠돌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몇 사람, 몇십 명씩 자기들끼리 모여 ‘우리는 큰 민족이 될 것이다’, ‘여러 민족의 복이 될 것이다’라며 외치며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적이지 않았던 삶을 살았다. 그것도 삼대에 걸쳐서 말이다. 만약에 주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그들의 모습과 말을 보고 들었다면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그만큼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작은 가족 공동체이며, 늘 떠돌던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430년이(출 12:40) 지나 몇 백만 명이나 되는 큰 민족이 되었음에도 그들은 애굽 구석에서 정착해 살고 있는 나라 외국인 노예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수백 년 전의 하나님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약속은 헛된 희망이었으며 대대로 내려오는 전래동화일 뿐이었을 것이다.






3. 이집트에서 그들은... 


흙벽돌을 굽고 있는 이집트 노예들
흙벽돌을 굽고 있는 이집트인 - 아스완 코끼리(엘리펀트) 섬 크문 신전


  일반적인 이집트 고대 역사가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약 430년이라는 시간 동안(출 12:40) 약 250년 정도(BC 1552-1305 -  버나드 앤더슨)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의 출현(출 1:8)으로 압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 연재). 성경에서 그들은 국가의 곡물 창고인 비돔과 라암셋에서 부역을 하였다 말한다(출 1:11). 하지만,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였기에 농사 그리고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를 시켰다(출 1:14). 흙벽돌 굽기는 이집트 고대 벽화에도 선명히 남아 있으며 3500-4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집트의 건물 방식으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나 지금이나 흙에 짚을 넣어서 벽돌을 굽는 방식은 똑같다(출 5:7 - 위 사진 참조).  그들은 400년 전 애굽에 왕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와 절반의 시간은 은혜를 경험했지만 나머지 절반의 시간은 그 땅에서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압제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당신은 노예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 상상해 볼 수 있겠는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인이 시키는 데로 아주 단순히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난 아주 오래전 한국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일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외국인 근로자들은 매일 늦은 밤까지 공장 기계 앞에 앉아 반복적인 일들을 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높은 학력과 더욱 창조적인 일들을 하는 삶을 살았었지만 한국에서의 노동자로의 신분 변화는 그들로 하여금 발전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공장에서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었다. 당시 어떤 젊은 근로자가 했던 말을 아직 기억난다.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생각과 삶이 아주 단순해져 다른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길게는 4년 정도를 단순 노동을 하는 이들도 그러할진대 고대 사회에서 무려 250년 이상 대를 이어 노예의 신분으로 노역을 한 이들의 상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노예는 좋은 미래를 기대하거나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또한 자신의 삶을 점검할 수 있는 철학적 고민도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을 자신과는 다르게 살 수 있도록 새로운 교육을 제공해 줄 수도 없다. 주인이 시키는 데로, 애굽의 세속 문화과 종교에 젖은 채로, 누가 자신들의 진짜 주인이며 진실로 따라야 할 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라는 자신들의 조상들에 대한 기억만 희미하게 남긴 채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어떠한 희망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섬길 수 있을 만큼의 삶의 여유가 있었겠는가?


참고도서

구약성서의 이해(버나드 W. 앤더슨)

WBC창세기(고든 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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