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가 만나는 곳은 대체로 느슨하고 헐겁다. 경계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삶과 죽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 경계를 지나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땐 저항과 설렘을 동반한다. 인간은 잠시 다른 세계를 여행하다 평행 우주로 가는 존재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경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인간은 거피 떼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모여 사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로 말미암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과거의 찬란한 문명을 포함해 적어도 지구 상에서는 유례가 없는 번영을 이룩했다. 하지만 모여 산다고 해서 실존적인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계가 공고할수록 그것이 해체될 때는 고통이 크고 소리도 요란한 법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대로 이 세상에 세금과 죽음처럼 확실한 것은 없다.‘바다와 노인’에 등장하는 상어처럼 우리에게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그 누구도 피할 수는 없다. 병원에 가면 어디나 집중치료실이 있다. 이승과 저승이 그저 침대 하나를 두고 갈리는 곳.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그곳. 용케 명부의 세계는 면했지만, 동공마저 풀려 초점을 잃은 모습.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를 수 없어 차라리 식물이 부러운 사람들. 제어하지 못하는 생리현상으로 인간의 존엄은 온데간데없고 가련한 생명체로써 대우를 받는 그들. 삶의 궤적을 중심으로 이어진 소중한 인연의 끈을 차마 놓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누구나 자신의 영역에서는 자신이 왕이다. 역량이나 시운에 따라 그 지경의 넓이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같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맺었던 인연과의 단절에 따른 상실감도 크겠지만 죽음에 수반되는 가장 큰 고통은 역시 ‘잃었던 왕관을 다시 찾아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절망감에 있다. 옛날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귀하게 다루다 끝나면 길가에 버려지는 추구( 芻狗,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누구든 종국에는 그런 운명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객관적인 가치나 현재 처지가 어떻든 재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면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에서‘빛나는 촉루’를 노래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벽제나 연화장의‘분쇄실’(pulverization chamber)에서 체험한 것으로도 생명의 약동(elan vital)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극명한 깨달음을 주었다. 역시 ‘무덤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