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수상 소식을 듣고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어서 요즘 말로 어그로를 끌려는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일 듯하다. 하지만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나온 다음 날 KBS TV 9시 뉴스에서 그가 하필 문인을 대표해 우리나라 작가가 수상한 소감을 방영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기영 작가의 작품 중 내가 제대로 읽은 건 <지상의 숟가락 하나>로 기억한다. 출간 이후 수 십만 권이 팔렸으니 대형 베스트셀러라 할 만하다.
젊은 세대에겐 다소 낯선 이 작가를 한 때 일 년 넘게 거의 매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 주요 입시과목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당시엔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학교였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최초로 남녀공학이었으며 교사 전원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이 사실을 한동안 잊고 있었으나 사립 고등학교 출신인 사촌이 최근 그의 친구에게 나를 소개하며 상기시켜 주었다. 또 내가 입학하기 불과 4년 전만 해도 반에서 중간 정도만 해도 서울대에 진학하는 학교였다. 실제로 반에서 꼴찌로 유명했던 선배가 우리 학교와 같은 동네에 있는 대학교 입시에서 과수석을 차지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담임 선생님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본고사가 입시의 당락을 좌우하던 시절이라 가능한 이야기다.
그 이상한 학교엔 워낙 실력이 탁월한 선생님이 ‘즐비해’ 내가 좋아하던 과목은 수업 시간 끝나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참고서를 낸 분들이 흔한 것도 이채로웠다. 반면에 나의 발목을 잡곤 하던 과목 시간엔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많은 은사들이 속칭 <사다리 선생>의 길을 걸어 국립대 교수로 전직하는 일이 많았다.
그건 그렇고 어느 날인가 영어 선생님이 갑자기 현기영 작가가 아닌 다른 분으로 교체되었고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순이 삼촌> 때문이었다. 그때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손톱이 뽑히는>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는 소문이 학우들 사이에 돌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강단에 복귀했는데 말수가 크게 줄고 웃음기가 사라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에 그의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평소 약간 우수에 젖은 인상이 그의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소식은 어쩌다 유명 재야인사와 항의 집회할 때 TV 뉴스에 간간히 비치거나 문예진흥원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얼마 전 한 지인이 현기영 작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문학모임이 있다고 귀띔해 그 자리에 참석해 오랜만에 은사를 다시 뵙게 되었다.
내가 평범한 학생이었던 데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당연히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현직 부장판사인 동기는 정확히 기억하는 게 이채로웠다. 비록 종합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과목만큼은 최상위권이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가 만일 수업 시간에 <내 작품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될 날이 있을 거야. 내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려면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져야 하니까 너희들 중에서 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소개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평소에 했더라면 그걸 귀담아듣는 학생이 적어도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 번역을 업으로 하는 제자가 적어도 한 명 이상이 있으니까. 선생님 좋은 게 뭔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줄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게 아닌가. 한강 작가가 여러 가지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특히 4.3 사건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 노벨상 수상의 원동력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록 한 번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이 없긴 하지만, 일본에선 뜻밖에 회사원이 노벨상을 타기도 하니 4.3 사건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의 비조라고도 할 수 있는 그가 수상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