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 인생은 더 달콤하다.

by 김광훈 Kai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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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ly real laughter comes from despair, " 진정한 웃음은 자포자기 상태일 때만 나온다.

그루초 막스 Groucho Max 미국의 미국 배우


"Oft hope is born when all is forlorn, "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 종종 희망이 태어난다.

톨킨 JRR Tokyo 영국의 대학교수, 언어학자, 작가 (반지의 제왕 저자)


실직이 주는 고통


나의 유년시절은 항상 충청도 서해안 소읍 변두리에 있는 대덕리 145번지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당시엔 드문 기와집에다 벽에 회칠을 한 집에서 출생해 줄곧 그곳에서 성장했다. 나의 어린 시절 끝자락까지 보냈던 집으로 지금도 기억이 난다. 대가족이 모여 살던 그 큰 기와집은 일손을 돕던 머슴까지 몇 명 두고 있어 늘 활기찼다. 농기구 보관함에는 내가 쓰던 소형 곡괭이도 있었다. 다섯 살만 되면 말을 타던 몽골인처럼 농업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때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큰 대문 앞에서 집을 지키던 진돗개에 낯선 사람이 물리자 속설에 효험이 있다는 개털을 상처에 붙였던 기억이 난다. 또 떠꺼머리총각 머슴과 산에 가서 그가 잿빛 산토끼를 작대기로 잡아 그날 저녁 탕으로 먹었던 일도 떠오른다. 아버지는 유년시절'우리 집도 쌀이 떨어져 봤으면 좋겠다.'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고 술회한 적 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백면서생이었던 아버지는 스크랩 광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유익한 기사나 화젯거리를 두꺼운 노트에 정리해 나도 어린 시절 재미있게 보았다. 지금까지 잊을 수 않는 기사로는 역대 미스 코리아 관련 뉴스 주요 군 장성 프로필, 미국 전 현직 대통령의 동정에 대한 보도 등이 있다. 그중 고종 황제의 사진 옆에 '아, 무능의 화신이여!'라는 비분강개의 표현을 첨가했던 것이 가장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가 역사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조선의 당쟁과 무기력함을 강조한 식민사관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시기라 아버지의 그 런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암군을 둔 데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이권만 차리기 바빴던 지배층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 국력이 약해지고 결국 일제 침탈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인생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느꼈는지 언제부터인가 그 스크랩 북에서 고종황제의 사진과 '아, 무능의 화신이여!'라는 표현을 슬그머니 삭제했다.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실직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인건비가 싸고 중국처럼 경제가 급성장할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우리 몸도 어느 한 곳이 고장 나야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비 로소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잃어버리면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온갖 시련이 시작된다.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이 누리는 자동차, 냉난방 시설이 갖춰진 집, 각종 진미, 스마트 폰 등 각종 이기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런 것은 이제 사치라기보다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초심을 잃지 않는 노부부의 아름다움


남녀가 사랑하게 되는 계기란 늘 신비로운 영역의 일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연애결혼을 했다. 하나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30대의 나이에 이미 동네의 대소사를 총지휘할 만큼 명민하고 호랑이 같았던 시어머니가 가난한 집 출신의 이북 며느리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더구나 얼굴도 보지 않고 집안에서 맺어주는 대 로 혼인해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부잣집 아들을 사랑에 빠지게 한 서당집 며느리가 시어머니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결혼이 후 교사로 십여 년 봉직한 후 여러 가지 사업에 손댔지만, 경험 부족과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해 수 없이 실패했고 이후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냈다. 그러나 가난한 집치고는 부부 사이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당시엔 흔했다고 할 수 있는 가정 폭력은 일절 없었고 다투는 일도 거의 본 일이 없다.


어머니의 바로 윗언니는 농사를 짓는 사람과 만났다. 그녀의 남편 즉 나의 이모부는 구두쇠로, 부지런한 데다 실용을 중시해 특용작물 재배와 목축업, 양돈 등으로 면 전체에서 두 번째 큰 부자가 되었다. 부자의 여유와 긍지는 그 위치에 있지 않고는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문난 부자였지만 그는 당시에 우리 집에서 입던 헌 옷으로 작업복을 대신했던 기억이 난다. '난 거지 든 부자'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산가였기에 옷이 남루해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마치 알부자가 연식이 10년을 넘긴 차를 몰고 다녀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같은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어머니와 이모는 이처럼 경제적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이모의 칠순 잔치를 마치고 일가친척이 이종사촌 집에 모였을 때다. 이모와 이모부는 물론 그들의 며느리들과 사위들도 있던 자리였다.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뛰어난 아버지는 예의 정신세계의 중요성과 물질을 초월한 부부의 사랑에 대해 역설했다. 처음엔 모두가 공감하는 듯했으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그런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감동이란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현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마련이다.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고 오십 년 넘게 사랑을 지속하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희망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삶은 감미롭다


참 기이한 일이지만 수입이 적더라도 일정한 직업을 갖고 고정적인 소득이 있으면 생활이 안정되는 경향이 있다. 자영을 통해 돈을 제법 많이 벌어도 수입규모가 들쭉날쭉하면 재산을 크게 모으지 못하는 사례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의복이나 음식을 구입해서 궁핍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빈곤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정해진 소득이 없으면 지출 계획을 수립할 수 없기에 재산을 형성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소원은 면서기라도 좋으니 남편이 일정한 수입원이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던 십여 년 동안 도베르만 핀세르, 쉐퍼드, 복서 등 여러 종류의 큰 개를 기르고 마당에는 아담한 연못도 있었다. 하지만 교단을 떠난 이후 혹한이 찾아왔다. 대부분이 힘든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한 아버지에게 세상은 냉혹하기만 했다. 결국 충남 서해안의 소읍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여섯 곳을 거쳐 졸업했으니 당시 상황을 알 만하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에 대한 적응력은 그때부터 생긴 것 같다. 군 복무 중 늘 잘 잤고 외국 출장에서도 마찬가 지였다.


이후 우리 가족은 서울에 정착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보통의 도시 서민이 그리는 삶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엔 드물게 연애결혼을 한 때문인지 노부부는 만년까지 다정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재정적인 곤란을 겪은 이유는 말할 나위 없이 정기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이 없던 탓이다. 일자리는 그만큼 중요하다. 그대,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아 막다른 골목에 갇힌 채 절망감에 빠져 있는가? 그런데 살아갈수록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은 작가 헨리 밀러의 말대로 기회가 막혀 있고 희망이 거의 없을 때 인생은 역설적으로 더 달콤하다는 것이다. 의욕이 솟구치고 전의가 불타오를 때는 오히려 모든 것이 순조롭지 않을 때다.


“기회가 막혀 있고 희망이 거의 없을 때 인생은 역설적으로 더 달콤하다.” (When opportunity is shut and hope is nearly gone, life paradoxically becomes even sweeter. – Henry Miller)

희망이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 오히려 삶의 본질과 감미로움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완벽할 때가 아니라, 시련이 밀려오는 바로 그때가 인생이 가장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시간이다. 그러니 오늘, 삶이 막막하게만 느껴진다면―이 순간이야말로 언젠가 돌아봤을 때 가장 값진 기억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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