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번역

상위 5%에게는 위기가 아닌 기회인 이유

by 김광훈 Kai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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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영 방송에서 AI 시대 직업의 명암을 다룬 <번역사> 편을 시청했다. 지상파의 시간적 제약과 취재자가 핵심에 접근할 수 없는 한계는 이해하지만, 내용이 지나치게 허술하고 피상적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보험 광고처럼 막연한 불안감만 조성해 시청률을 유도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사실 더 위태로운 곳은 공중파 뉴스 매체들이다. 나 역시 TV를 안 본 지 반년이 넘었다.


다시 번역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000년대 이전, 지인의 부탁으로 처음 번역을 시작했을 때는 모든 과정이 100% 수작업이었다. 당시 한영 번역 단가는 영한보다 2배 정도 높아 수익이 꽤 쏠쏠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본업에 전념하느라 10여 년간 현장을 떠나 있다가 퇴직 후 다시 번역업에 복귀했다. 물론 업무 자체가 해외 고객과 늘 회의 또는 상담하고 문서 작성하는 것이다 보니 경력 단절은 없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자유롭게 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었다.


하지만 복귀 후 가장 놀란 점은 번역 단가가 20년 전보다 오히려 절반 가까이 하락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필자가 아는 한 어느 업종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일부 유명 업체가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요율을 유지할 뿐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한영과 영한의 단가 차이가 10% 이내로 좁혀져 있었다. 이는 더 이상 수작업에만 의존하지 않는 업계 분위기를 반영한다. 번역 회사들은 요즘엔 트라도스(Trados) 같은 CAT Tool을 넘어 AI 연동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번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어를 오류 없이 완벽하게 번역해 주는 AI가 하루빨리 출현하길 바란다. 어학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노력 대비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번역은 여전히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고단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언어의 장벽 없이 일본, 프랑스, 베트남의 뉴스를 마음껏 읽고 싶은 사용자 중 한 명이다.


일대일 대응이 명확한 공학 분야 등은 기계 번역의 오류가 적지만, 그 외 분야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변호사, 회계사, 의사 같은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번역 역시 상위 1~5%의 전문가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항상 발생하기 마련인 AI가 범한 치명적인 오류를 잡아내고 문맥을 완성하려면 결국 상위 1~5% 수준의 어학 실력 & 전문 분야의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기업이 보안이 극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면, 내부의 고급 인력을 번역에 투입하기보다 외주를 활용하는 것이 비용과 정확도 면에서 훨씬 합리적이다. 또 NDA 계약을 맺을 수 있기에 오히려 내부 직원보다 안전할 수도 있다. 직원들이 AI를 사용하더라도 번역사와 달리 매일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번역 작업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완성도도 떨어진다. 외국어 능통자를 부가가치가 적은 단순 번역 업무에 묶어두기보다, 그들이 영업이나 기술 개발 등 핵심 역량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는 훨씬 현명한 전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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