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옛날 사람이잖아!"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지는 모르나 딸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 나이 차이 저와는 기껏 삼십 년도 안되는데 나더러 옛날 사람이란다. 팔 구십 년생 젊은이에게 광주항쟁이나 7-80년대 민주화 투쟁이 먼 옛날 얘기이듯, 이제 오십 대 후반을 향하는 나에게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다.
지난주 서울 갔다 오는 길 인천공항 서점에서 들고 온 김훈 작가의 2017년 신작 소설인데, 생각해보면 이야기의 배경이 그리 옛날도 아니다. 불과 한두 세대 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베트남 파병을 거쳐 79년 대통령 시해 사건 때다. 일제시대 중국을 떠돌던 주인공 마동수와 흥남 철수때 남편과 피붙이를 잃고 부산에 도착해 낙동강에서 피 묻은 군복 세탁일을 하다 마동수를 만나 부부가 된 이도순, 그들의 두 아들 마장세와 마차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다 마차세를 만나 결혼한 박상희로 이어지는 남루한 가족사다. 집집마다 한 보따리씩은 쌓여 있을 법한 이야기다. 김훈은 작가 후기에 이렇게 썼다.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쓸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현실에서 발붙일 수 없었던 내 선대 인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그들의 기록, 언행, 체취, 몸짓, 그들이 남긴 사진을 떠올리면서 겨우 글을 이어나갔다.
소설 속 그들의 질곡 어린 삶이 남 일 같지 않은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월남 파병 갔다온 삼촌친구가 주셨던 씨레이션 박스 초콜릿의 오묘한 맛에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 돌아가면 어른들 모시고 옛날 얘기 제대로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