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학교에서 스쿨에 오자마자 박사과정을 담당하는 스텝 할머니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건물을 소개받고 방학이라 많지 않았던 사람들을 소개해 주셨다. 시차 적응은 물론이고, 영어도 잘 안 되는 나는 그 순간이 별로 반갑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그거 하려고 미국에 온 것이 아닌가? 방학이라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1층으로 내려가니 (건물이 좀 특이하게 언덕에 있어서 현관문으로 들어가면 거기가 3층이고 교수 방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 그래서 던젼이라 불렀다), 교수 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그중에 하나의 방 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고, 그 할머니는 그 할아버지 교수를 인사시켜준다. 할아버지 교수가 반가운 듯 맞아주며 앉으라고 하니 그 할머니는 나를 던져놓듯 놓고 가버리셨다.
그 교수님은 Tenure-track (테뉴어를 받지는 않았으나 테뉴어를 받을 수 있는 패스에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형태라 볼 수 있음)은 아니었고 (교수들의 Tenure 및 직급/직책은 나중에 별도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다), 이미 은퇴를 하시고 학기 별로 계약을 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Clinical Professor 이었는데, 나이가 89세 이셨던 Dr.Pier Abetti 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한번 방문을 하면 1~2시간은 훌쩍 지날 만큼 말씀이 많으셔서 희비가 많이 엇갈리는 분이었다. 그런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일단 나를 반겨해 주시는 그분의 이런저런 질문을 듣고, 본인이 GE에서 근무를 하셨고, 당신의 아버지가 에디슨과 함께 GE에서 일했다고 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첫 만남부터 2시간 동안 역사 공부를 하고 나니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느낄 때 즈음, 그분이 "근데 너의 연구 분야는 무엇이냐?"라고 하길래 당시만 해도 아주 개략적인 아이디어만 있었던 나는 출연연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 미국 대학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때 주제가 한국경제발전에서 출연(연)의 역할이었고, 그걸로 학회 발표를 했었다고 하니 그 논문을 한번 가져와 보라고 한다 (아직 학기 시작하기 전),
* GE는 많이 아시겠지만 Edison을 포함한 몇 명의 공동창업자가 설립을 했고, 그 중에 Edison Machine Works는 RPI가 위치한 Troy 옆 Schenectady, NY 에 있었다. 현재도 GE의 연구시설이 Niskayuna에 있다.
다음날 집정리도 안된 상황에서 노트북을 뒤져서 그 논문을 들고, 그 스텝 할머니께 부탁해서 출력해서 가져가니 당신이 한번 읽어 보겠노라고 하시면서 예전에 KAIST와 학생 연계도 한 적이 있고 모 교수님을 아신다고 또 한참을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미팅에 가보니, 논문을 난도질을 해놓으셨다 (정말로, 난도질.. 컴퓨터가 없으셨고 일일이 손으로 직접 옮겨 쓰시면서, 다른 책을 복사를 해서 가위로 오려 붙여 놓으셨다). 그러시면서 아주 흥미로운 논문이다. 이거 나와 함께 논문을 써보겠냐고 말씀을 하셨다. (아직 학기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논문을 함께 쓰자고 하시니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분은 정성적 연구를 주로 하시는 분으로 RPI의 박사과정에서는 정성적 연구는 배우지 않았고, 정량적 연구를 주로 배워 다른 교수들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어떤 실적이 생기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내가 출력해서 드렸던 논문을 손으로 직접 옮겨 쓰시고 어떤 부분은 복사를 하셔서 가위로 오려 붙인 한 뭉큼의 서류를 주셨다. 이거를 정리해서 (다시 타이핑) 다음 주에 보자고,
나에게는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일단 손으로 쓰신 필기체의 손글씨를 알아보는데 정말 애를 먹으며 주신 manuscript를 수정하고, 또 다음주에 난도질된 논문을 받아 들고 이를 다시 수정하고 이를 몇 주를 반복하였다. 그 논문이 대략 완성될 무렵 Lally에서는 매년 여름 방학이 지나면 학생들의 완성된 페이퍼를 가지고 박사과정생들이 발표를 하고 교수님들의 코멘트를 듣는 자리가 있다. 나도 이 논문이 완성이 되어 발표를 하겠다고 했고 (지금 생각에서는 무슨 배짱?) 발표를 하자 약간 말을 잇지 못하는 교수님들의 반응들 (아마 정성적 논문 접근 법이기도 하고, 주제가 별로 재미도 없었을 것이고, 일단 영어가 제대로 되었는지도 기억이 안 남)..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였는데, 동기들은 1년 차가 발표하다니 이건 기록에 남을 거라면서 토닥거려 주었다. (이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지금도 발표는 쉽지가 않다). 여하튼 그 논문은 1년 차가 끝나기 전인 2010년에 출간이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 교수님과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집으로 초대도 해주시고, 틈틈이 맛있는 것들도 사주시곤 했다. 내 다음해도 다른 1년 차 학생들과 꾸준히 논문을 쓰셨고 아마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열심히 살았구나 라는 걸 증명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있는 듯하게 느껴졌다. 그의 열정은 참 대단했는데,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컴퓨터가 없는 방) 약 1시 정도까지 연구를 하고 다시 집으로 가셔서 낮잠을 2시간 정도 주무시고, 그 이후 할머니와 함께 2시간 정도 걷는 생활을 반복하신다고 했다. 나이가 89세였지만 운전도 직접 하시고 그 열정이 대단하셨는데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그렇게 하셨음), 와이프가 미국으로 오고 나서 가족이 왔다고 알고 있던 중국 친구들을 함께 불러서 직접 이탈리아 음식을 해주시겠노라며 (이탈리아 출신)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는데 아주 아담한 집에 두 분이서 살고 계셨는데, 식사 도중 '어찌 그렇게 건강하시냐?'며 물어보니, 나에게 "그 비밀을 알고 싶니?" 하시기에 끄덕거렸더니 웃으면서 "in born (타고난 거다)"라고 하시는 거다. 알고 보니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100세를 넘는 장수 집안이었던 것이다.
90이 다되신 두분이 직접 차려 주신 저녁상
차려있는 음식을 설명해주시는 Dr.Abetti (한국인과 중국인 학생이 온다고, 아마도 일본에서 받은 외투를 두르셨다)
음식을 직접 덜어주시는 교수님
지하실에 가득 쌓여있는 책들 (저 책장을 직접 만드셨다고 했다)
거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분이 정말 아기자기하게 사셨다 (미용실을 갈 용기를 못 내 장발이 되어 버린 나..)
그렇게 학기가 한참 시작되고 있을 때 교수님이 "내 친구가 RPI 출신 노벨상 수상자 인데, 내 수업에 특강 하러 오는데 관심 있으면 들으러 와" 하시는 거다. 잉? 노벨상 수상자라니! 기록을 찾아보니 RPI는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1964년에 박사를 받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Dr.Ivar Giaever이다. 당일 교수님 수업을 찾아가니 학생들이 있긴 한데, 내가 기대한 '노벨상 수상자 XXX 강연' 하면서 큰 오디토리옴에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수업의 일환이었다. 이 것이 놀라웠다. 웬 할아버지가 와서 자신이 노벨상을 받기까지의 일생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고, 학생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당연히 30% 알아들었나 모르겠다) 방식이었다. 알고 보니 매년 교수님은 이 분을 수업에 초대해 특강을 하셔서 엄청난 auditorium에서 하는 그런 특강은 아니었다.
기억나는 것중에 하나가 '나는 노벨상을 너무 이른 나이에 받았다'면서 아쉬움 섞인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곤 '잉?' 하는 것이 나의 첫 반응이었다. 이 분은 너무 이른 나이에 상을 받아서 상금과 여기저기서 연구관제를 받긴 했지만, 연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분의 인생은 연구보다는 초청 강연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 보니 연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에서는 항상 '최연소' 타이틀을 붙이고 하루라도 일찍 어떤 성취를 이뤘다고 강조를 하는데 진짜는 이렇구나 하는 느낌을 느꼈다.
* 이 분은 44세에 GE에서 근무할때 'Electron Tunneling and Superconductivity' 연구로 1973년에 노벨상을 수상.
수업이 끝나고 흔한 사진한장 찍지 않고 (아마 매년 해서 그랬을 듯, 그리고 너무 오래전 이야기니까) 다들 그렇게 강의실을 나가는 것이다. 나도 그냥 가려다가 언제 또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겠나 싶어서, 그 할아버지 연구실에 찾아가니 두 분이 말씀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1973년 노벨물리학생 수상자인 Dr.Ivar Giaever와의 인생샷 (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체육복을 입고, 그 분도 소탈했다)
아직 나는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다.
다음 편에는 화룡점정 - 드디어 차를 구매하다 편을 써보도록 하겠다.
출처: https://07701.tistory.com/118 [강박의 2 c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