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끓는 라면의 수증기를 보면 행복할까?
"엄마 라면 끓여줘! 계란도 두 개 넣어줘"
어린 아들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소파 아래 주저앉아 개어내던 빨래를 멈추고 부엌 찬장에 라면을 한 봉지 꺼냈다. 아들은 장난기가 많았다. 가지런한 빨래를 기어코 헤짚어 내며 커다란 아빠의 치노바지를 입고 헐렁한 허리춤을 부여잡았다.
"엄마 이것 좀봐"
마룻바닥에 질질 끌리던 바짓단처럼 엄마의 미간에는 약간의 주름이 졌지만, 그러다 넘어진다고 바짓단을 크게 크게 접어줬다. 아들은 쪼그려 앉은 엄마의 어깨너머로 끓어오르는 라면 수증기를 보며 행복해했고, 보드라운 어깨에 턱을 폭 기대었다.
그때의 엄마는, 내가 기대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바위 같았다.
그 바위가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건 병원이라는 이름의 공간에서였다. 엄마는 수혈을 맞아가며 위를 3분의 2나 복강경으로 절개하는 위암 수술을 해냈다. 엄마는 혈액암도 있었다. 피를 멈추게 해주는 혈소판 수치가 정상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혈소판은 지혈을 도와주는 혈액 구성 세포인데, 작은 상처에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 정밀검사 결과를 받아보니 골수이형성증후군이라는 혈액암이었다. 그런 이유로 수술을 하는 동시에 혈소판 수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혈액암을 가진 환자가 위를 부분절개하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자체가 고난도였기에 의사는 여러 번의 고민과 논의 끝에 수술을 강행했다. 엄마가 수술실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내 손은 패딩 주머니가 축축해질 정도로 많은 땀이 났다.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생각만 속으로 돼 내었다. 그때가 연말이었기에 병원 수술실 앞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트리에는 작은 메모지에 환자와 가족들의 염원을 담은 소망들이 적혀있었다. 나도 펜을 들었고 소망을 적었다.
살면서 내 소망이 이루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엄마가 수술 베드에 누워 수술실을 나왔고, 보호자를 불러 모은 의사는 다행히 잘 끝났다고 말했다. 림프에도 전이된 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의사 선생님이 신 같았다. 엄마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게 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는 편하게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엄마의 병이 다 나은 것 같았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고 말했다.
위암 복강경 수술은 어느 정도 회복이 끝났고, 엄마는 이제 퇴원해서 2주에 한 번씩 수혈을 맞으러 서울 병원에 가야 했다. 발을 내달 때마다 쇠못이 박히는 것 같은 통증을 참아내며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말했다.
"라면 먹고 싶네, 아들"
몇 개월 동안 병원에서 싱거운 무균 식단만 해서 입맛을 잃은 엄마의 첫마디였다. 위암 환자에게 라면이라니,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라면을 먹고 싶다는 엄마에게 투덜거렸다.
"왜? 계란도 두 개 넣어줄까?"
엄마가 살이 빠져 헐렁해진 바지를 걷어올리며 소파에 앉았다. 나는 여태 고생하고 고작 라면 하나에 흔들리는 엄마의 태도가 속상했지만, 쪼그려 앉아 엄마의 바짓단을 접어 주었다. 엄마는 야윈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순간 엄마와 내 역할이 바뀐 것 같았다. 장면만 남고 시간은 거꾸로 흐른 느낌이었다.
혹시 엄마도 라면 위로 끓어오르는 수증기를 보면 행복할까.
몇 번을 고민하다가 부엌 찬장에 라면을 꺼냈다.
"... 그럼 국물만 좀 먹어볼래?"
내 말 한마디에 엄마는 기대에 찬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커버렸고, 엄마는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