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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의 하루 Aug 29. 2022

집 앞 개천

나는 (개)천세권이 필요하다.


이제는 꽤 잘 정비된 우이천

초등학생 이후로도 나는 여러 번 이사를 다녔지만 생각해보면 집 근처에 항상 개천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동네 개천은 이름도 없이 개천이라고 불렀다. 개천가로 내려 가는 길이 없어 철조망을 넘고 뛰어내려야 갈 수 있었다. 길이나 시설도 없어 물은 흐르는 대로 있었고 나머지는 돌과 흙바닥, 누군가 몰래 심어놓은 농작물들이 있었다. 해마다 누가 개천물에 빠졌다는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장마로 물이 넘칠 때는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곳이 '우이천'이라는 이름도 제대로 부르는 늠름한 천이 되었고 내려 가는 계단은 개천이 지나는 동네마다 빈틈없이 있다. 개천을 따라 산책로와 운동기구, 여러 시설들도 잘 갖춰져있다. (이제는 너구리도 나온다.https://mnews.jtbc.co.kr/News/Article.aspx?news_id=NB12064007)


집 근처에 개천이 있으면 모기나 벌레가 많거나 장마철, 태풍철에는 개천 범람 등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여름철만 피한다면 아이들에게는 좋은 놀이터이자, 어른들에게는 꽤 괜찮은 산책로이며 자전거 트랙이다. 개천 산책로를 따라 걷기, 달리기 운동은 물론 자전거를 타기도 했었다. 때로는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맥주 한 캔 씩 들고 만나기도 했었다. 광장이 없는 우리 마을에서 개천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머물고, 모이고, 지나가는 광장인 셈이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서울 용산구에 살았다. 전세 계약을 할 때 집의 입지, 상태, 환경을 주로 중요하게 봤다. 그 중에서도 입지라고 하면 시끄럽지 않지만 번화가가 근처에 있어야하고 지하철 역은 걸어갈 수 있어야한다는 것. 노트북 들고 잠깐 갈 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퇴근하고 장보러 가는 마트도 도보 10분 내에 있어야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입지 좋은 집에 사는 동안 위에서 나열한 편리함은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개천의 부재는 내가 갈 수 있는 어떤 하나의 공간, 광장의 상실을 느끼게 만들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전기킥보드, 수 많은 행인들까지. 보도블럭 위는 달리기나 자전거 타기에 적합하지 않다. 인도는 중간중간 차도에 의해 끊겨있기 때문에 마음껏 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주변에 있는 작은 동네 공원에서 빙글빙글 달리는 것 또한 답답함을 느꼈다.

천마다 조성된 벚꽃길은 봄날 걷고 싶은 거리가 된다.

다시 한 번 개천이 있는 곳으로 이사왔다. 우이천과는 서울 반대편에 위치한 안양천과 목감천이 흐르는 곳.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서울 중심 입지가 제공하던 편리함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적어도 나는 괜찮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동네 카페로, 장보러 가는 대형마트가 아닌 작은 동네 마트로 불편하지만 대체가 가능했다. 하지만 동네를 관통하는 개천은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대체 불가한 고유 입지다. 언제든 뛰러 나갈 수 있는 공간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난 오늘도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저녁에는 집 앞 개천에서 달리기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다음에 이사 갈 때도 '집 앞 개천' 입지는 놓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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