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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의 하루 Nov 05. 2022

누칼협의 시대

누가 그거 하라고 칼들고 협박했어?

요즘 직장인들 커뮤니티인 블라인드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누칼협'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누군가 자신이나 회사의 처지를 하소연하면 댓글에 어김없이 ‘누칼협'이라는 댓글이 달리는 경우가 많다. 회사 다니는게 힘들다는 하소연이 담긴 글에는 어김없이 댓글에 ‘누가 칼들고 그 회사 들어가라고 협박했냐?’라는 공격적인 힐난이 넘친다. 이 문장이 무서운 것은 단순히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시도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을 1인칭으로만 살아간다. 태생적으로 내가 보고, 듣고, 맡고, 먹는 것만 느낄 수 있다. 우리와 가장 닮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모님, 형제, 자녀 같은 가족들에게 조차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인터넷에서 얼굴도 모르고, 전혀 다른 공간에서 사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탈중심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점점 더 개인화된다. 같은 뉴스와 이야기를 듣고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우리가 같이 공유하는 가치는 ‘자유’와 ‘자본’이라는 오래전 이념 전쟁에서 살아남은 낡은 두 단어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과의 교류가 없는 진정한 ‘개인’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생활 속에서 남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들(음식, 청소 같은 서비스와 공산품을 포함한 재화)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의식주가 무한하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타인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대화를 할 필요가 없으니 목소리가 필요가 없다. 생존만 하면 되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다. 1년을 살아도, 100년을 살아도,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타인이 없다면 인생은 우리 머리 속에서는 하는 망상과 다름없다.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다. 나를 봐주는 사람도, 기억해줄 사람도, 평가해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매 순간 휘발된다.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을 때마다 나는 가끔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살아있는 서로의 따뜻한 온기가 맞닿은 피부를 통해서 전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감동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익명의 인터넷에 사적인 고민거리를 올리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10초만 남을 위해서 의미있게 쓰고자한다면, 몇 byte 안되는 댓글로도 충분히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라는 따뜻한 온기를 전달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온기를 넘어 구조의 손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요, 그럴 수 있어요’, ‘저도 당신을 이해합니다’, ‘같이 힘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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