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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의 하루 Apr 10. 2023

영구조망권

나의 첫 신혼집은 신축 빌라였다. 새 건물이라는 게 좋아 바로 계약하고 들어갔지만, 일반 아파트와 다른 점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바로 주변 건물과의 간격이 아파트만큼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 아파트가 아니고 일반상업지구였기 때문에 옆 건물 창문을 손으로 열 수 있을만큼 가깝게 건물을 붙여 지어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 작년에 아파트 바로 앞에 상가 건물이 지어져서 유명했던 서초의 어느 아파트가 그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https://www.wikitree.co.kr/articles/796471

내가 살던 신혼집은 맞은 편 집에서 샤워하고 나온 것까지 보일정도니, 반대편 집에서도 우리집이 마찬가지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집에 사람이 있을 때는 커튼을 쳐서 집 내부를 가렸다. 낮이고 저녁이고 창문은 마치 교도소 감방의 조그만 창문처럼 누군가 감시하는 통로가 되버렸다. 항시 닫아놓은 커튼 덕분에 햇빛을 못보고 어둡게 사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빛을 가린다고 해도 인간은 다양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길 건너편 건물에 티비소리, 싸우는 소리, 청국장 냄새, 담배 냄새까지. 시각은 가려서 닫는다고 해도 환기를 하거나 더워서 창문을 열어두면 참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의 침범이 느껴졌다. 내 공간에 타인의 간섭이 들어오자, 휴식처로서의 집이 사라졌다.

신혼집 이사온날 거실 창문.. 맞은 편 집이 적나라게 보인다
옆 빌라와의 간격.. 심지어 주인도 다르고, 업체도 다른 두 집.

그 집에서 2년을 살고난 이후 조망권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창문의 본래 역할인 바깥 세상을,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집에 살고 싶었다. 첫 신혼집에서 이사나올 때쯤 근처 아파트에서도 서초 아파트와 비슷한 일이 생겼다. 내가 이사올 때는 주변에 그 건물보다 높은 건물이 없어 가까이는 남산부터 멀리는 서울 중심, 광화문도 보였을 XX아파트가 2년만에 창문을 열면 새로운 지어진 회색벽이나 옆집 창문이 맞닿아있는 아파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당장은 조망권이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망권이라는 것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때문에 다음 거주지 선정 시 현재의 조망권 뿐만 아니라 미래 조망권도 중요한 고려 포인트로 삼았다.

신혼여행 때 찍은 샌프란시스코 숙소 조망권


4~5년 전 속초에 놀러갔을 때 속초는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양한 신축 아파트와 리조트가 바다 앞에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가장 큰 홍보 문구는 ‘영구 바다 조망권’. 건물과 바다 사이가 이미 충분히 가까워 더 이상 건물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이 보장된다는 달콤한 이야기였다. 서울에서도 영구조망권을 꿈꿀 수 있을까? 서울 같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보기 싫어도 모르는 타인를 보면서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파트뷰도 별로긴 하지만 적어도 멀리에 있다..

지금 집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는 유수지 공원이 있다. 폭우 시 침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 위에 세워진 공원. 저수지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기 때문에 향후 10년 간은 집 앞에 공원에 건물이 들어올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영구 공원 조망권’은 내가 여기 사는 동안은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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