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과 죽음을 가져온 그녀의 작업이 마침내 완수되었다. 변두리의 쓰레기에서 날아온 파리가 사회를 썩게 하는 효소를 가져와 이 모든 남자들에게 앉기가 무섭게 독을 뿌린 것이다. 그것을 잘된 일이었다.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거지와 폐인밖에 없는 그녀의 세상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치 태양이 떠올라 살육의 현장을 비추듯, 그녀의 성(性)이 쓰러져 있는 희생자들 위로 찬란하게 솟아올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짐승 같은 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는 천전한 소녀였다. 그녀는 쾌활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풍문하고 기름진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에밀 졸라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비견할 시리즈로 제2제정시대인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사회와 인간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리기위해 ‘루공마카르 총서’를 썼다. 루공과 아델라이드 푸크에서 비롯된 집안의 남녀 120여 명의 삶을 그린 루공마카르 총서는 모두 20권으로 구성되었고, 이 중 《나나》는 9권이다. 나나는 아델라이드 푸크의 4대손이자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와 알코올 중독자 쿠포의 딸이다. 그녀는 머리도 별로고, 연기력도 별로지만 타고난 미모로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 뭇 남성들의 사로잡으며 파리 사교계의 총아로 떠오른다.
에밀 졸라의 작품을 흔히 자연주의 작품이라고 한다. 여기서 자연주의란 ‘자연’을 그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에 입각했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즉 사람의 심리란 생리적 현상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 인간에게 있어 삶의 궤적은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 유전, 기질 같은 것에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나에게 있어 부모의 알코올 중독과 신경증은 그녀 삶의 커다란 규정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소설은 나나가 연극에 데뷔하고, 남성들을 홀리고, 그 많은 남성들을 파산시키고, 결국은 자신도 천연두로 죽게 되는 삶을 그린다. 에밀 졸라는 그런 삶을 통해 나나라는 한 여인의 삶의 궤적도 그리지만, 그녀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 그것도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타락을 처절하게 비판한다. 여인의 육체에 매혹되어 정신을 못차리고,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결국은 구렁텅이로 빠지고, 또 죽어가는 남성들의 행태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병든 단면이었다. 그러면서도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를 외치며 전쟁(보불전쟁)에 뛰어드는 장면은 그 사회가 얼마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지를 보여준다(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처절한 패배를 맛본다).
나나에게 빠져 나락에 빠지는 이들의 신분들도 다양하다. 독일인 은행가 스타이너, 궁전의 시종장인 뮈파 백작, 순진한 소년 조르주와 그의 형이자 군인인 필리프, 방되브르 백작, 슈아르 후작, 푸카르몽 등. 이 모든 이들 중 가장 하류층에 속하는 조연배우인 퐁탕만이 나나에게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나나를 휘어잡고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당당하다. 그리고 나나 역시 그의 사랑을 갈구하기만 하고, 복종한다. 에밀 졸라가 이 역전된 관계를 통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나나는 순진한 여인이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를 타락에 빠지도록 하고, 또 생명까지 잃도록 했지만 자신이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저 남자들이 가져오는 돈에 따라 자신의 몸을 내주었다. 그녀의 육체가 악마였던 거지, 그녀가 악마였던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을 그렇게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하지만 에밀 졸라가 이 단순한 성격을 지닌 여인의 복잡한 삶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깊게 이해하고자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장 아름다웠던 그녀는 가장 추한 질병으로 죽어간다. 육체는 한 시절의 영화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덧없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