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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소환한 17세기 이탈리아, 소설로 그린 현재

알레산드로 만초니, 《약혼자들》

by ENA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약혼자들》은 분명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발표한 이 소설은 17세기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롬바르디아 지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것은, 스페인 치하의 밀라노라는 상황, 종교의 권위의 존속과 위기, 밀라노에서 벌어진 폭동, 30년 전쟁, 그리고 페스트의 창궐 등을 말한다. 그런데 단지 이러한 사건들을 둘러싼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켰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을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분명 실제 역사를 뚜렷하게 배경으로 삼고, 실제의 인물들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실제 소설에서 주요 인물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그런 인물은 아니다. 역사의 뒷자락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인물들이 그 시기에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단지 역사만을 기술했다는 비판은 그래서 타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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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19세기에 왜 17세기를 소환했을까? 그는 17세기를 통해서 19세기 이탈리아의 나아갈 바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되지 못한 이탈리아가 커다란 제국(스페인, 프랑스, 합스부르크 등)의 입김에 휘둘리는 상황, 종교가 정말로 담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인간의 힘이 해결하지 못하는 재난에 대응하는 모습 등을 17세기 혼란스러웠던 역사를 배경으로 현재(그러니까 19세기) 이탈리아가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극복해야 할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역사소설이면서 단순한 역사의 소설은 아닌 이유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돈 압본디오 신부다. 너무나도 성인 같은 크리스토포로 수사나 페데리코 추기경 같은 인물(그들의 성(聖)스러움은 누구도 쉽게 흉내내지 못하는 것이란 점에서 공감이 가지 않는다), 돈 로자리오 같은 악당은 일관적이며, 입체적인 모습이 아니다. 역사 속 인물이면서도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다는 의미에서 무명인으로 지칭한 이도 악인의 삶에서 성인의 삶으로 전환했지만, 그 전환의 계기가 그다지 인상 깊지 않고, 또 전환의 순간이 너무 급작스럽고 그 간극이 너무 커서 공감가지도 않다. 주인공인 약혼자들 렌초와 루치아도 그렇다(그나마 낫다). 하지만 돈 압본지오 신부는 그렇지 않다. 신부이면서 가장 현세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협박에 못 이겨 고민하다 결혼식 주례를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를 쓰고, 전쟁의 참화에서 가장 먼저 도망가고, 추기경의 추궁에 변명을 일삼으며, 그러다가 렌초와 루치아가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이러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례 서는 것을 머뭇거리다 결국엔 렌초가 사면을 받자 결혼을 주관한다. 그러면서도 그게 자신의 공인 양 떠벌인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닌가? 소설에서 선과 악의 인물들로 인해 자못 지겹고, 평면적인 소설이 되는 것을 막아주는 인물이 바로 돈 압본디오 신부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듯하다.


그리고 소설에서 또한 인상적인 부분은 페스트에 관한 서술이다. 페스트는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정말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무지로 인한 집단 수용이 가져온 폐해, 페스트의 창궐을 특정 집단에 전가하는 모습(여기선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 혹은 칠장이), 그리고 페스트가 가져온 사회의 피폐화와 궁극적인 변화 등등. 렌초와 루치아의 행복한 결론은 어떻게 보자면 페스트라는 이 비극적인 재난을 뚫고 이루어진 것이란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고, 신비스러운 것이란 생각도 든다. 물론 페데리코 추기경과 크리스토포로 수도사의 종교적 힘에 의해 그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연인을 행복으로 이끌어 준 결정적 계기는 페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혼자들》을 현대적인 의미에서 세련된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를 충실하게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민중의 삶을 그려냈고, 그러면서도 분명한 지향성을 내세웠다는 점, 그리고 일부 인물들을 상당히 입체적으로 그려낸 점은 크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드문드문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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