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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퀸, 악마와 거래를 트다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1》

by ENA

토마스 만은 나치 독일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했고, 영국 BBC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며 나치를 비판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7년 《파우스트 박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소설의 집필 과정을 또 다른 책으로 남길 만큼 공을 들인 작품이다. 단순히 인물의 삶을 그린 소설이 아니라, 예술적이고, 이지적이지만 결국은 세계의 대참상을 부른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일으킨 독일인과 독일의 정신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 정신과 문화에는 예술뿐만 아니라 문학, 종교(신학), 사회관, 국가관, 철학 등등을 포괄하고 있다.


1권에서는 세계적인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죽음 이후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이자 그의 곁을 늘 지키왔던 인문학 교수 제레누스 차이트불룸이 레버퀸의 젊은 시절까지, 즉 악마와의 거래를 트는 장면까지를 그려내고 있다. 명민한 어린 시절의 모습부터 신학을 전공했다 음악으로 방향을 트는 레버퀸은 잠깐의 유혹으로 매음굴에서 한 여인과의 성관계 후 매독 증세를 보인다. 증세는 금방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4년 후(매독은 오랜 잠복기를 가지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하는 도중에 악마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 독일에 전승되어 오던 파우스트 신화, 그리고 괴테의 작품 《파우스트》의 상황이 그대로 그에게 재현되는 것이다. 이름도 없는(아니, 무어라 불러도 상관없는) 악마는 24년의 거래를 제안하고,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음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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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솔직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당대에 논의되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예술과 문화, 종교와 사회 등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소설 속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논의들은 실상은 거의 토마스 만의 목소리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유럽 사상가들의 사고를 대변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 철학의 논리가 아주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 소설을 이해하고자 하는 관성에서 보면 매우 당혹스러운 소설인 셈이다. 특히나 수많은 음악가들과 음악 이론가들의 이름을 보면, 토마스 만은 이들을 아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말 낯선 이름들이 많다(물론 그들을 다 알아내고, 이해해야만 이 소설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악마와의 거래를 튼 레버퀸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예술을 펼칠지, 그리고 어떤 고통에 시달릴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뭐든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민족’이라는 단어와 그 개념 자체는 항상 뭔가 원초적이고 우려할 만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는 누군가 군중들을 퇴보적이고 악한 상태로 유혹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 ‘민족’ ‘민중’ 운운하면 통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우리 눈앞에서, 혹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는 아니더라도 ‘민족’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졌는가! 신(神)의 이름으로, 혹은 인류나 정의의 이름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73쪽)

나치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일을 맥락적으로 이해해야만 이 구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도 비판적으로 직시해보아야 할 대목이 없지 않다.


“내가 이 민족의 정신적인 고양, 맹목적인 열정, 반란, 궐기, 분출, 대개혁, 이른바 모든 혼돈을 정화하는 새 출발을 생각하면, 10년 전에 시작된 민족주의의 재탄생을 생각하면 내 심장이 경련을 일으킨다. 겉보기에는 성스럽던 그 도취, 하지만 이미 옳지 않다는 징후로서 매우 난잡한 야만성과 뭐든 때려눕히자는 식의 야비함에다 모독과 학대와 굴욕을 꺼리지 않는 추잡한 욕구가 잔뜩 뒤엉켜 있던 그 도취, 그리고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보이던 전쟁을, 지금 이 전쟁의 모든 비극을 품고 있던 그 도취를 떠올리면 말이다.” (335쪽)

- '10년 전에 시작된 민족주의의 재탄생’은 말할 것도 없이 나치의 집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토마스 만이 ‘도취’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독일인들은 그 민족주의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선량하고 모범적인 평균 수준의 사람들이 방랑하며 성공을 위해 야심차게 노력하던 젊은 시절의 삶에서 벗어나 시민적 삶으로 들어서게 되는 반면, 아무도 모르게 낙인이 찍힌 어떤 인물은 정신의 세계와 문제로 점철된 길을 결코 떠나지 않고, 아직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길을 나아가야 했다.” (239쪽)


“결국 그녀는 다보스 요양원으로 보내졌지만” (402쪽)

만의 대표작 《마의 산》의 배경이 바로 ‘다보스 요양원’이다.


“예술가라는 존재는 범죄자와 미치광이의 형제인 거야. 그럴듯한 작품을 만든 인물이 범죄자와 미치광이를 이해하지 못하고도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병적인 것은 뭐고, 건강한 것은 뭐냐 말이야! 병적인 것이 없이는 인생은 절대 가능할 수 없는 거야.” (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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