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민,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저자는 머리글에서 『한일 근대인물 기행』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언급했는데, 바로 내가 그 독자 중 한 사람이었다(https://blog.yes24.com/document/17491158; https://blog.naver.com/kwansooko/222994796155). 거의 1년 만에 박경민의 후속 작품을 읽는다. 우리와 일본의 근대사 공간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을 비교해서 왜 역사가 그렇게 결정되었는지를 보았던 게 『한일 근대인물 기행』이라면,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었는가』은 근대 한일 역사의 시점이 되는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제목이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었는가”이니 책은 그 답을 주어야 한다. 박경민은 이 책에서 두 가지 사건을 이야기한다. ‘강화도 조약’과 ‘경복궁 점령 사건’. 강화도 조약이야 익숙하지만, 경복궁 점령 사건은 어쩐지 낯설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강화도 조약은 1/3 정도에 불과하고, 경복궁 점령 사건에 관한 내용이 2/3에 이른다. 말하자면 일본의 근대사 왜곡이 바로 이 경복궁 점령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한반도로 진출한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점령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이 청일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정말 굵직굵직한 사건이 연이 벌어졌던 해가 바로 1894년이다. 그 해에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고, 갑오개혁(또는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경복궁 점령 사건은 바로 갑오개혁 바로 직전에 조선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에 의해 벌어졌던 사건으로, 저자는 이 세 격변의 사건과 관련이 있지만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며 잊혔던 사건, 경복궁 점령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고 전주성까지 점령당하자 조선 조정은 청에 군대를 청하고, 이에 대응해서 일본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한양을 점령한 일본이 조정을 장악하여 갑오개혁을 하고, 이후 청과 일본 사이에 전쟁, 즉 청일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 이 시기의 사건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정말로 복잡하고 교묘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청을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경위와 일본이 이를 기화로 군대를 인천항으로 끌고 온 과정부터 복잡하다. 청을 끌어들이고도 바로 회군을 요구한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었다. 일본은 텐진조약을 들먹이며 조선에 들어왔는데, 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공관을 보호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이런 목적이 별로 타당성이 없어지자, 조선의 내정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는 목적을 내세우며 철군에 응하지 않는다. 어처구니없는 내정 간섭이었지만, 이에 대해 조선은 중얼거리만 할 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했고, 청도 일본의 의도를 처음에는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는 중에 경복궁 점령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을 포로로 잡고, 대원군을 복귀시켜 갑오개혁을 실시하고, 결국에 조선 조정의 청군축의뢰서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청과의 전쟁을 벌이고, 조선 정부군과 함께 동학농문군 토벌에 나선다. 일본은 이 경복궁 점령 사건이 조선 국왕, 즉 고종의 요구로 궁에 들어가다 갑자기 조선 군사의 발포로 인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해왔다. 하지만 박경민은 당시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일정천사』라는 책의 기록을 토대로 이 사건이 일본 외무대신이던 무쓰의 암묵적 지시와 방조를 토대로 주한일본공사 오토리와 일본군 여단장 오시마의 치밀한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신흥국으로 국제무대에 나서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자 이 사건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사건 왜곡에 대해선 전혀 분노하게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역사 왜곡을 하도 많이 봐와서 그럴까? 이런 역사 왜곡이야 그저 평범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그렇다고 그들의 침략 행위를 용서할 수도 없고, 이미 지나간 과거라 묻어버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허둥지둥거리기만 한 조선 조정의 태도에 대해선 헛웃음이 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또한 분노스럽기도 하다. 개혁의 의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강력한 대응 의지도 없었다. 정국을 읽는 역량이 부족했기에 일본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청군을 불러들였다가 아차 싶어 다시 철군을 요구하는 장면은 어처구니없기도 하다. 무모하면서 한심스럽다는 저자의 평가라 딱 맞았다.
대체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은 세부 역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세부가 중요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