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줌파 라히리는 내게 특별한 작가다. 신문 지면에 내 이름을 두고 나온 첫 글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글이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읽고 쓴 것이다. 그저 그래서만은 아니다. 적어도 국내에서 출판된 것으로 내가 알고 있는 줌파 라히리의 책은 다 읽었다(『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를 보니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있었다. 『로마 이야기』가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이란 제한을 둔 이유다). 나는 그녀 소설의 경계성과 운명을 거부하는 운명성을 좋아한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느닷없이 이탈리아어로만 글을 쓰겠다는 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옮긴이의 말’이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여서 그대로 옮겨본다.
“줌파 라히리는 2012년 이탈리아로 이주하면서 장편소설 『저지대』(2013)를 끝으로 앞으로는 이탈리아어로만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더니 정말로 이탈리아어로 에세이를 쓰고(2015년, 2016년) 소설을 쓰고(2018년, 2022년) 시를 썼다(2020년). 이탈리아 단편선을 옮겨 엮고(2019년), 이탈리아 장편소설 세 편을 영어로 번역했다(2017년, 2018년, 2021년). 2018년 작 『내가 있는 곳』을 직접 영어로 옮겼고(2021년), 신작 소설집 『로마 이야기』는 아홉 편 가운데 여섯 편을 번역했다.”
나는 의아했다. 왜 이탈리아어지? 그녀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기도 하단다. 이 에세이집의 첫 꼭지글이 <왜 이탈리아어인가>이기도 하다. 한국인에게 왜 영어지?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영어로 글을 쓰는 이에게 왜 이탈리아어지? 라는 질문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의미가 있는 이유가 있다. 앞서도 얘기했던 그녀의 경계성이다. 벵골어와 영어 사이에서 자라고 말을 하고, 글을 써온 그녀가 어떤 제한 속에서 다른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라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왜 굳이 이탈리아어이지? 라는 질문에 대한 이 글에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왜 프랑스어가 아니고, 왜 독일어가 아니고, 왜 한국어가 아니고? 물론 이 ‘굳이’라는 부사가 들어간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의미가 없다.
제목이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이다. 정말 잘 지은 우리말 제목이다. 분명 이 에세이집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번역은 ‘나와 타인’이라는 어떤 인격적 존재를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로 물질적 존재인 나의 책과 남의 책(이탈리아어로 된)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말 제목은 그것을 확장했다. 그런데 읽다보면 물질적 존재를 해석하는 행위가 다시 인격적 존재를 해석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번역이란 걸 해봤다. 물론 전공 서적이었고, 몇 chapter를 맡아서 한 ‘작업’이었다. 거기에 내 개인의 기예가 들어갈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쉽지 않았고, 또 노고의 대가도 별로 없었다. 사실 더 신경 쓰였던 번역은 따로 있다. 이제 곧 나올 책에 인용한 부분들이다. 논문의 중요한 부분을 번역해서 넣는데, 그걸 논문의 말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려니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말이 되어 있었다. 옮긴 말을 두고, 원문은 제껴두고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다시 옮기는 작업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한 문단 옮기는 게 그렇게 까다로울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했던) 번역은 그가 어떻게 썼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가 어떤 내용을 썼는지, 혹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줌파 라히리는 열 꼭지의 글을 엮었는데, 여기의 글은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탈리아로 쓰인 글을 영어로 옮긴 것도 있고, 영어로 쓰였지만 이탈리아어로도 발표된 것도 있다. 로마와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썼다. 어느 쪽으로나 이중언어 텍스트다. 낯설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저자에게는 이 옮겨다님이 중요했을 것이다.
애초에 책의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글들이지만, 용케도 ‘번역’이라는 주제로 묶였다. 처음으로 인상적인 것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소설 세 편을 번역하고, 후기로 쓴 글 세 편이다. 자신의 번역한 소설에 대한 후기는 흔히 ‘옮긴이의 말’로 쓰이고, 작품에 대한 설명, 혹은 느낌(즐거움과 어려움을 포함하는)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줌파 라히리는 스타르노네라는 작가, 그의 소설의 훌륭함에 대해서도 물론 이야기하지만, 그 옮긴이의 말에서 번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저자의 의도를 옮기는 작업에 대한 생각, 유의어에 대한 생각 등등. 스스로 작가이기에 다른 언어의 작가의 글을 옮기고 쓰는 글도 작가답다.
더 인상 깊은 것은 <그람시의 ‘트라두치온’>이다. 인도 벵골계의 미국 작가이자 이탈리아어 사용자인 줌파 라히리의 글에서 그람시를 만나리라고는 정말 상상할 수 없었다. 이 글에 다다르고 ‘그람시’라는 제목을 보고 한참 맞나 싶었다. 그러고보니 그람시는 이탈리아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를 쓰는 그람시를 읽고, 그의 언어와 생각에 대해 쓴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긴 이 글은 그람시에 대한 ‘깊이깊이 읽기’다. 그람시의 표현대로 “돌에서 피를 뽑아내”듯 그람시의 마음 깊은 곳을 읽으려 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읽었던 그람시는 줌파 라히리가 읽은 그람시와는 매우 다르다. 깊이도 다르다.
줌파 라히리가 쓴 번역에 대한 글귀를 대충 모아봤다. 이렇게 모아보니 번역이라는 작업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 수 있다. 지적 편력의 상당 부분을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얻는 나로서는 그런 수고로운 작업을 해주는 이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왜 이탈리아어냐고? 다른 눈을 키워보려고, 취약함을 실험해보려고”
“한 사회와 문명이 전진하고 발전하려면, 자양분의 원천을 바꿔나가는 게 중요하다.”
- <왜 이탈리아어인가>에서
“이미 한 언어로 아름답고 무성하게 자란 것을 다른 언어 안에 이식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제”
- <통>에서
“수없이 많은 무서운 복도의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길”
“무엇보다 제거(elimination)의 과정이다. 본질적으로 기존 텍스트의 파생물. 분신을 만들어 변환하는 행위이고, 그로 인한 변형은 완료 시점에도 어딘지 불안하고 숙고의 여지가 남는다.”
- <병치>에서
“자기 나름의 언어로 자신이 비전과 해석에 따라 문학작품의 메아리를 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
“거울을 응시하다가 그 안에서 자기 외에 다른 이를 보게 되는 그런 것”
- <에코 예찬>에서
“장기이식이나 심장판막 수술만큼 위험하고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
“한 사람의 언어적 좌표가 달라지는 일, 놓쳐버린 것을 붙잡는 일, 망명을 견뎌내는 일”
- <나를 발견하는 곳>에서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단어를 고르는 작업이고, 번역은 저자가 고른 단어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감정하는 작업이다.”
- <치환>에서
“죄수의 이송과 언어의 이송”
“텍스트 간의 결혼. 부디 변치 않길 소원하는 친밀한 결속 같은 것”
“두 텍스트, 개념, 현실, 순간 사이에 맺는 친밀하면서도 불완전한 관계를 암시한다.”
“의미를 해석해 재창조하거나 개선하거나 근사치에 접근해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라면”
- <그람시의 ‘트라두치온’>에서
“기존에 존재하는 텍스트에 그것과 다르면서도 동시에 근본적으로는 동등한 의미를 입히는 것. 동의어처럼 문자 그래도 더 많은 경로와 더 많은 의미를 창조하는 행위”
- <언어와 언어들>에서
“새로운 각도에서 낯선 외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인식해가는 각성의 한 형태”
- <이국의 칼비노>에서
“새로운 몸으로 변신한 형상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내 마음이 기우니”
-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의 첫 행이자, 줌파 라히리가 번역 강의 첫날에 늘 칠판에 적는 구절. <변신을 번역한다는 것>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