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갈망이 결정이 된다"

줌파 라히리, 『로마 이야기』

by ENA

인도계 이민 2세대 미국인으로 영어로 소설을 쓰던(심지어 퓰리처상까지 받은) 줌파 라히리는 어느 날 이탈리아어로만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고 아예 이탈리아로 건너간다. 정말 그랬다. 마이너 언어 작가가 메인 언어로 쓰겠다고 하는 경우야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줌파 라히리는 그게 자신의 글쓰기에 어떤 또 다른 돌파구가 될 거라 여겼던 것 같다. 이제는 미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영어로도 글을 쓰는 것 같지만, 여전히 이탈리아를 오가는 삶을 살고 있다.


최근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을 읽으며 내가 그녀의 작품 가운데 놓친 게 있다는 알게 되었다. 그게 바로 『로마 이야기』다. 역시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집이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은 과거 영어로 쓴 소설에도 경계인, 혹은 혼종인의 삶과 의식, 그리고 그런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회에 대한 시각에 짙었다. 어떤 이는 이를 ‘이주 문학’이라고도 했다. 『로마 이야기』에서는 이 상황을 한 단계 더 연장했다. 인도계 미국인 작가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겉으로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미국을 이탈리아의 로마로 대체할 수 있어 보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다. 줌파 라히리라고 하는 어떤 태생적 조건을 가진 작가의 눈과 새로운 언어를 거쳐 나온 그 이야기는 좀더 걍팍하고, 좀더 핍진하다(평소 잘 안 쓰던 말을 썼는데, 그건 쉽게 내 느낌을 전달할 단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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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 모두 로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거의 모두 이주자의 이야기다. 어떤 이는 이국의 땅에서 자리를 잡은 중산층이지만(<재회>, <P의 파티>, <행렬>)이지만, 더 많은 이는 밑바닥에서 겨우 살아가고 있다. 이민 2세대의 소년은 이탈리아와 부모의 국가 사이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고, ‘밝은 집’을 꿈꾸었고, 어렵사리 그런 집에 살게 되었지만 이웃들의 증오에 쫓겨나고 만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어둡고 비좁은 집도 사치가 된다. 주인 아주머니 대신 ‘택배 수취’하거 갔던 소녀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오토바이를 탄 소년들의 총격을 받는다.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 여인은 떠나가라 위협하는 ‘쪽지’를 받는다. 그들은 로마에서 뿌리를 박고 살고 싶지만, 떠나라는 협박 속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간다. 중산층에 편입된 이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보다는 피부색이 더 먼저 보이는 법이다. 아이들로부터 경멸받기 일쑤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제목이 ‘로마 이야기’이고, 작가가 로마에 머물면서 이탈리아어로 썼지만, 제목을 ‘서울 이야기’라고 하고, 동남아시아 출신의 작가가 서울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소설을 썼다 해도, 거의 모든 부분을 고치지 않고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설들이 아닌가, 하고. 우리도 ‘얼마 없으면 저들이 여기 대부분을 차지하고 말 거야.’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듣지 않나? 그렇게 이 소설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면 이 이야기들은 뼈저린 송곳이 된다. 소설은 그렇게 보편성을 얻고, 우리는 우리를 돌이켜본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이 이야기들은 아픔이 되고, 반성이 된다. 줌파 라히리의 글을 그 자체로 전혀 자극적이지 않지만, 다시 곱씹어 보면 예리하다.


<단테 알리기에리>에서 “모든 갈망은 결정이 된다.”는 말이 나온다. 소설의 모든 이가 갈망한다. 그리고 그 갈망을 통해 결정했다. 그것이 지구 반대편으로의 이식(移植)이다. 뿌리를 다시 심었다. 그 뿌리가 어디서고 튼튼히 땅을 붙잡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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