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균호, 《세계 문학 필독서 50》
소설가 김영하는 “유퀴즈”란 TV 프로그램에 나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우리는 보통 자기감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는데, 소설을 읽으며 자기감정을 알게 된다고 했다. 즉,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비로소 언어화해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박균호는 《세계 문학 필독서 50》의 프롤로그에 “우리가 읽었던 소설은 우리를 좀 더 현명하고 깊이 있는 통찰로 안내한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미처 표출하지 못한 해묵은 감정을 정화하고 인생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고 했다. 김영하의 말과 다른 듯하지만 결국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상황을 소설을 통해 경험한다는 얘기다. 그게 내면화될 수도 있고, 혹은 외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소설 읽기는 무척 가치 있는 일이다. 알겠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소설, 그것도 고전으로 분류되는 소설 50권을 소개한 책은 왜 읽어야 할까? 어쩌면 굉장히 도전적인 질문이다. 왜 이런 책을 썼냐는 얘기니까 말이다. 아주 즐겁게, 또 밑줄까지 쳐가며 굉장히 의미 있게 읽었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어쨌든 가치 있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책이 있다. 피에르 바야르가 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물론 피에르 바야르는 정말 그런 ‘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반드시 무엇인가를 읽어야만 책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독서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사실, 책을 소개하는 책을 읽을 때면 떠오르는 책이다. 어쩌면 책을 읽지 않고도 책을 읽은 척하는 데 무척이나 괜찮은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이용한 경우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본다. 적어도 박균호 작가는 그런 용도로 이 책이 소비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 같다. 《율리시스》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이 심각한 철학적 담론을 담고 있으면서, 무척 어렵다고 정평이 난 책은 굳이 50권에서 제외한 것만 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흔히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이 아닌 작품을 적지 않게 소개하고 있는 것에서도 그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엔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해변의 카프카》, 토마스 만의 경우엔 《마의 산》이 아니라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서머싯 몸의 경우엔 《달과 6펜스》가 아니라 《인간의 굴레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엔 《금각사》가 아니라 《가면의 고백》 같은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도 좋지만, 그 작가를 이해하는 데 더 타당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을 선택하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어떤 작가나 그 작가의 작품을 요약해서 파악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진짜 읽기를 바라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들의 섬세한 감정 묘사를, 시대에 대한 세밀한 설명을, 그들이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그들이 소설을 통해서 어떤 치유를 받았는지를, 시대를 넘어서서 보편적인 가치를 어떻게 고민해야 할 지를 여기에 소개한 소설을 통해서 함께 느껴보자는 것이다.
이미 읽은 작품 중 이미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경우는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 작품에 대해선 내가 읽으면서 가졌던 생각과 비교해봤다. 내가 옳다든가, 혹은 저자가 옳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작품을 평가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분명하게 다른 작품도 있었다. 이를테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같은 경우). 그리고 (대부분이지만) 아직 읽지 못한 작품에 대해선 밝은 길잡이로 삼기로 했다. 꼭 읽어보리라 마음 먹은 작품이 생겼다. 다시 들춰보며 길잡이로 삼은 여기의 평가와 느낌이 나와 어떻게 같은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해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