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 그 길고도 깊은 이야기

제임스 빈센트, 『측정의 세계』

by ENA

사실 측정, 또는 단위에 관한 책은 꽤 있다. 좀 읽기도 했다. 최근에 나온 성균관대의 김범준 교수의 『세상은 왜 다른 모습이 아니라 이런 모습일까?』도 그런 류의 책이다(물론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은 다르다). 그래서 제임스 빈센트의 『측정의 세계』를 집어들면서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비슷한 얘기를 또 읽는 거 아닌가 하는...


그래도 기꺼이 읽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원제다. “Beyond Measure: The Hidden of Measurement”. 뒤의 것은 그냥 그런데, “측정을 넘어서”라는 제목이, 이게 뭔가 다른 것을 얘기할 것 같았다. 두 번째는 표지의 “<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이라는 문구다. 물론 광고용이지만, 역시 뭔가가 다르기 때문에 <타임스>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게 했다(광고에 홀딱 넘어간 거라 해도 상관은 없다. 이런 식으로 알려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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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측정’에 관한 책이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은 대충 예상을 한다. 아주 오랜 옛날의 측정에 관한 역사,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측정 단위를 쓰고, 같은 단위더라도 다른 척도로 쓰면서 생긴 혼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미터법 제정, 그밖의 다른 단위들, 그리고 현재 물리학의 원리에 따르는 길이라든가 무게, 시간의 단위 등등. 다른 이야기가 있겠는가? 있어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똑같은 소재를 가지고 얼마나 잘 쓰느냐의 문제인가?


제임스 빈센트의 방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위에서 내가 대충 예상한 것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좀 다르다. 물론 미터법을 중심에 놓은 것은 마찬가지다(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다른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측정과 측량학을 접근한다는 점이다. 측정에 관한 필요성을 개인과 국각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도 한 가지 예다. 그리고 온도의 측정에 관한 다양한 접근은 장하석 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에 많이 의존하고는 있지만, 다시 한번 측정의 표준을 설정하고, 실제 측정하는 행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임의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캘빈 경의 예에서 보듯이, 그리고 이후 미터법의 발전에서 보듯이 임의성을 넘어서 절대적 기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미터법에 대한 저항이다. 미국에서 미터법이 좌절된 상황은 물론, 영국에서 바나나 판매와 관련해서 소송이 벌어지고, 그것이 브렉시트까지 연결되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것이면서, 이 측정에 관한 부분이 매우 민감하면서 역사적인 것은 물론, 매우 시사적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우 심각하면서도, 어찌보면 우스꽝스러운 미터법 저항단의 활동도 알게 되었다. 저자의 경우는 아무래도 영국인이어서 그런가? 미터법의 이상과 현실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제국단위(야드나 인치 같은)에 대해 어느 정도는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측정에 관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 후에는 현재를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측정하고, 기록하는 현대의 삶 말이다. 사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 극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기록되는 삶과 생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반성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무작정 쓸려 가는 것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그게 나의 자기 합리화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측정이 점점 추상화된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더라도 충분했을 터였지만, 측정에 관한 다양한 측면, 즉 참여와 소외가 동시에 이뤄지는 역사와 현 상황을 깨닫게 된 책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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