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삶이었던 역사가가 님긴 마지막 역사 담론

이영석, 『나의 공부는 여기서 멈추지만』

by ENA


한두 부분이 실제적으로 필요해 들추게 되었는데, 결국은 끝까지 읽었다. 읽기 전에도, 읽으면서, 읽은 후에도 여러 생각이 많이 든다.


우선 이영석이란 분에 대해.

그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라는 번역서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영석이란 이름은 각인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기회를 통해서 그의 책을 몇 권 읽게 되었다. 『삶으로서의 역사』를 읽고서야, 내가 읽었던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의 역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을 읽었다. 2022년에 읽었으니 저자가 돌아가시고 한두 달 후였지만, 나는 몰랐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이영석이란 분의 프로필에 생몰 년도가 함께 표시된 걸 보고서야 돌아가신 걸 알았다. 요즘 기준으로 꽤 이른 나이였다.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분인데도, 책도 겨우 몇 권 읽었을 뿐인데도 괜히 마음이 그랬다. 역사가로서의 삶에 대해 쓴 글을 읽어서였을 거 같다.


『나의 공부는 여기서 멈추지만』에는 추도사가 2개 들어있고, 이영석도 자신이 이 책이 마지막이고, 곧 생을 마감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나의 삶은 여기서 멈추지만”이 아니라 “나의 공부는 여기서 멈추지만”이란 제목이 그가 공부와 삶을 하나로 여겼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일생 동안 비주류로 살았다. 일류 대학 출신이거나 서양사 학계에서 거의 일반적인 유학파가 아니다. 국내에서 학위 과정을 마쳤고 지방 중소대학의 교양과목 선생으로 30년을 지내다 퇴직했다. 중년에 이르러 주로 영국의 대학에 자주 출입하는 행운을 누렸을 정도다.”


그는 매우 성실한 역사가였다. 영국사가 전공이었던 그는 거의 영국사만 팠다. 집중했다고 해야 한다. 여러 논문을 수정해서 낸 이 책에서 그는 “순수하게 영국사에 관한 글이 세 편“뿐이라고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한두 편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글이 영국 이야기가 등장한다. 집요하다가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그렇게 찾아가는 느낌이다. 나는 보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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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부로 나누고 있다.

‘전쟁과 수난’이란 제목을 붙인 1부에서는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원정)에 참전했던 독일 출신 병사의 회고록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국가들의 참전에 관한 기록들, 19세기 국가폭력에 저항했던 영국의 피털루학살과 인도의 잘린안왈라 공원 사건을 다루고 있다.


2부 ‘근대의 성취, 근대의 한계’에서는 제목 그대로 근대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원(park)에 천착한 글이 있고, 19세기의 유럽사를 보는 시각으로 리처드 에번스의 『힘의 추구』라는 책에 대한 서평이 있다(더불어 에릭 홉스봄에 대해서도). 전염병, 특히 19세기 콜레라, 황열병, 페스트에 대한 국제 공조의 사례를 연구한 글, 영국의 노령연금 도입에 관한 논쟁도 다루고 있다. 다채롭다.


3부에서는 서양에서 바라본 동양, 동양에서 바라본 서양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 여행기에서 다루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 찰스 피어슨의 저작을 중심으로 19세기, 20세기 초반의 황화론과 지금의 중국 경계론이 어떻게 다른지, 아놀드 토인비의 아시아 여행기를 통해 그가 보고 느낀 것, 그리고 식민지 시대 경제학자 이순탁의 세계일주기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렇게 보면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글을 쓴 것 같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으로 대체로 좁은 시기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한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그는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 깊은 점은 그가 다루고 있는 저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늘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글에서 그런 것이 드러나는데, 특히 인상 깊은 글은 리처드 에번스의 『힘의 추구』라는 글에 대한 서평 형식의 글이다. 그는 리처드 에번스라는 역사가와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잘 아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에번스의 저작에서 지구사적 시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따뜻했던 사람으로 보이지만, 학문과 글에서만큼은 날카로웠다.


늦었지만 이영석 교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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