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낯이 익다. 낯이 익을 수밖에 없는 게, 이미 많이 봐왔던 그림이다. 장 자끄 상뻬라는 작가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지 못할 뿐. 『꼬마 니콜라』는 너무 익숙하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의 그림도 기억이 선하다.
그런데, 『꼬마 니콜라』나 『좀머 씨 이야기』에서는 장 자끄 상뻬라는 작가가 그림만 그렸다면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는 자신이 직접 스토리까지 입혔다. 보통은 글을 쓰고 거기에 그림을 넣는 것이겠지만, 여기선 그 반대의 느낌이다. 그림이 먼저 들어오고 나중에 글이 거기에 입혀진 것 같은 느낌이다.
당연한 것이고, 이미 접해온 것이지만 그림이 따스하다. 선이 단순한 거 같지만,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고, 끊어진 선들은 생각의 공간을 남겨준다. 공간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기도 하고, 휑하니 비워두기도 한다. 다 채워진 공간 속에 세세한 그림들을 하나씩 들여다 보는 재미와 비워진 공간을 스스로 채워가는 재미가 함께 한다.
그런데 글도 따스하다. 라울 따뷔랭은 자전거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고칠 수 있다. 자신의 이름 따뷔랭이 자전거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쓰일 정도다. 하지만 정작 자전거 위에서는 균형을 잡지 못한다.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그것은 늘 자신이 간직한 작지만 커다란 비밀이다.
그러나 그가 간직한 비밀 때문에 커다란 사고를 당하고 만다. 마을에 피구뉴라는 사진사라 새로 오고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피구뉴는 마을 사람들을 찍었고, 따뷔랭도 찍고 싶어 한다. 그것도 언덕 꼭대기에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따뷔랭은 자신의 비밀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결국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 웃픈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따뷔랭의 사진은, 그가 사고를 당한 사실과 함께 신문에 실리고, 따뷔랭과 피구뉴는 유명세를 타고 만 것이다. 그의 비밀은... 더욱 큰 비밀이 되고 만 것이다.
따뷔랭은 그 비빌의 무게에 짓눌려 침울해하다 여행을 갔다 돌아온 피구뉴에서 사실대로 말하게 된다.
“나는 한번도...... 단 한 번도....... 이 얘기를 진작 했어야 하는 건데...... 이건 비밀이오...... 날 좀 이해해 줘요...... 내가 할 줄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러고는 따뷔랭은 웃고, 피구뉴도 따라 웃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다. 그러나, 뭐랄까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작은 깨달음 같은 것도 생긴다. 사실 교훈 같은 것은 의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