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필립스・존 엘리지, 『썰의 흑역사』
제목이 『썰의 흑역사』이지만, 원제는 “음모” 또는 “음모론”, 즉 “Conspiracy"다. 톰 필립스가 써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우리말 제목이 『인간의 흑역사』와 『진실의 흑역사』였다. 이전의 책들도 원제가 따로 있긴 했지만, 분명 ‘인간’과 ‘진실’의 ‘흑역사’였다. 그런데 이번엔 ‘썰’이라고 했다. 만약 이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어떻게 할지 궁금할 정도로 우리 식의, 게다가 약간 은어 같은 말이다. 사실 ‘썰의 흑역사’라고 하는 것보다 원제가 이 책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가 더 분명해 보인다. 그래도 우리말로 ‘음모론’이라는 제목보다는 ‘썰의 흑역사’라고 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의 손을 탈 것은 분명하다(나도 마찬가지다).
음모론에 대한 책이니, 우선 음모론이 무엇인지부터 정해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어렵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애매한 문제다.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바뀌어 왔고, 사람에 따라서도 음모를 대하는 태도가 변해왔다. 그래서 한 마디로 음모론이 어떤 것인지를 얘기하는 것인지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긴 하다. 저자들은 일단 음모론이 무조건 틀린 것이라는 전제부터 제거했다. 대신 음모론을 사건 음모론, 체제 음모론, 초음모론과 같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이를 통해서 음모론이란 “단순히 부족한 증거를 가지고 사건의 실체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에 기반하느냐가 음모론과 정설을 구분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음모론이란 증거 없는, 혹은 빈약한 증거에 기초한 ‘이론’이라는 얘기인데, 그런 음모론에 사람들은 왜 빠지고, 의존하는 것일까? 저자들은 갖가지 음모론을 제시하면서 이에 관해서 파고들고, 또 그런 음모론이 그릇된 것인지를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일루미나티에 대해서는 두 차례에 걸쳐서 이야기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사실 우리에게는 조금은 낯이 선 것이긴 하지만 외국에서는 일루미나티에 관한 음모론이 굉장히 광범위하고 뿌리가 깊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얼마나 근거가 부족한지도.
그밖에 저자들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유명인에 관한 것(예를 들어, 폴 매카트니의 죽음에 관한 음모론), 링컨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암살에 관한 것이 있다. UFO도 빠뜨릴 수 없고, 우리가 최근에 겪은 팬데믹에 대한 음모론도 있다. 팬데믹에 대한 음모론은 과거의 백신 음모론과도 연관이 있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음모론은 참 어떻게 할 바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세계사가 조작되었다는 음모론, 이를테면 중세 시대 300년이 없다는, 그러니까 300년이 밀렸다는 얘기 역시 정말 서양 중심의 음모론이 아닐 수 없다.
톰 필립스와 존 엘리지아 음모론에 관심을 가지고 책까지 쓴 것은 어쩌면 2021년 1월 6일의 트럼프의 대선 패배에 항의하고 쿠데타를 시도하며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이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군대까지 동원하는 나라에서 음모론으로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부정하는 움직임이 폭력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미국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누구라도 음모론에 빠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도 어떤 음모론을 믿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어투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게 음모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음모론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음모론에 대한 얘기는 민감하며 스스로 깨닫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저자들은 음모론이라는 토끼굴에 빠지지 않는 길잡이를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지만, 결론은 “우리 누구도 음모론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자기 점검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부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나의 믿음에 맞는다고 동조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러 음모론을 읽으며 다잡는 나에 대한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