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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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제목의 책은 없다. 이 책을 구성하는 다섯 편의 글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산문집 세 권에서 가져온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굳건히 인식하게 한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의 글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이 책의 표제작으로 삼은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다. 그런데 이 글은 기억에 없다. 찾아봐도 이 글은 없다. 내가 읽은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도 원래대로가 아니고 골라서 편집한 책이었나?
궁금한 것은 이 다섯 편의 글을 고른 기준이 뭘까?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도 이 책의 마지막 글 <결정자가 된다는 것: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에서 좋은 산문을 고르는 고충(?) 내지는 기준을 이야기했는데, 정작 이 책에서는 이 다섯 편의 산문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는지 알 수 없다. 두 편의 글은 10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길고, 나머지 세 편은 한 자리에 앉은 채로 다 읽을 수 있는 글인데, 이 전혀 어울리지 않음직한 글이 하나의 책으로 엮여진 사정이 궁금하다(사실 아무 이유도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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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인상 깊게 읽었고(http://blog.yes24.com/document/10414455), 그래서 《이것은 물이다》까지 읽었다(http://blog.yes24.com/document/10432476). 그런데 그의 책이 더 번역되어 나온 것은 몰랐다. 계기가 된 것은 짐 홀트의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이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다른 분야도 아닌 수학에 관한 책(《Infinite Jest》)을 썼다는 게 아닌가? 칸토어에 관해서, 무한에 관해서.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 책을 찾아보는 와중에 번역된 책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과 《끈이론》 (《끈이론》은 제목처럼 최신 물리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테니스에 관한 책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고등수학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이 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수사학과 수학 멜로드라마>는 수학소설 두 편을 평하고 있는 산문이다. 수학에 관한 소설을 소설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평할 수 있는 이는 어쩌면 거의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두 편에 모두 수학적으로 모자란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한 편이 낫다고 하는 이유는 수학 때문이 아니라 소설의 관점에서다. 수학을 잘 안다고 수학적으로 조금이라도 엄밀한 책의 손을 들지 않은 건, 그래도 그가 소설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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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주 축제, 영화 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소설가 존 업다이크의 소설, 수학 장르 소설, 그리고 최고의 에세이 선정에 관한 변(辯). 이 다섯 가지 소재를 다룬 다섯 편의 산문에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자의식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일리노이주에서 펼쳐진 촌스러운 축제를 단지 서술하고 묘사하는 것 같지만, 그걸 보는 시각은 철저히 월리스 자신의 것이고, 그게 어떻다고 평하지 않지만 그가 어떻게 보는지는 선연하게 드러낸다.
이 자의식 과잉의 산문가(나는 그의 소설을 읽은 바가 없고, 모조리 산문만을 읽었으므로)는 지금 세상에 없다. 그가 남긴 것은 글뿐이다. 자의식을 그렇게 선연하게 드러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싶기도 하다.
(그의 자살을 생각하면서,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바로 직전에 읽은 《약국에 없는 약 이야기》가 떠오른다. 우울증 약으로 인한 자살 사례들 중 하나가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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