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브 위잔, 『애서광들』
그러고보니 장르도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앤드루 랭과 오스틴 돕슨의 『책 사냥꾼의 도서관』을 읽었고, 이어 고른 책이었다. 그러니 비슷한 류의 책이라 여겼다. 책이 나온 시대(19세기말)도 비슷하니.
첫 편 <『뮤즈 연감, 1789년』>을 읽으면서도 이 책의 정체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했다. 뒤의 목차를 보고도 그랬다. 두 번째 이야기 <시지스몽의 유산>을 읽으면서야 이 책이 어떤 부류의 책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 이 책은 ‘꾸며낸’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그런데 교묘하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깜빡 속아 넘어갔듯이 마치 실재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같다. 하기야 이야기꾼은 꾸며낸 이야기를 마치 실제처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주인공을 빼놓고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존 인물이니 더더욱 그렇다. 마치 그랬을 것 같은 이야기. 그러면서도 조금은 황당해서, “그래?”하고 고개를 앞으로 당길 이야기. 그게 바로 이 책의 이야기들이다.
제목이 “애서광들”인 만큼, 애서가를 넘어서 애서광(狂)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다. 책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간절하게 책에 매달리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시지스몽의 유산>에서 귀한 책을 얻기 위해 기상천외한 제안을 하고, 애를 쓰는 라울 기유마르나, 평생에 걸쳐 음란한 책을 모으는 케르아니 기사와 같은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에 관한 이야기에는 ‘읽는 행위’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책의 물질성이나 상징을 사랑하지, 책을 읽고, 그 내용에 감복하는 이야기는 그런 애서광들에게는 없다. 그리고 그런 애서광들에게는 반-영웅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책에 질린 사람들이다. 시지스몽의 사촌여동생이 그렇고, 상퀼로트의 병사들이 그렇다.
대신 기괴할 정도로 책을 좋아한다는 내용은 없는 이야기들에는 책을 ‘읽는 행위’가 등장한다. <『뮤즈 연감, 1789년』>이 그렇고, <시인 스카롱의 새해 선물>이 그렇다. 그렇다면 저자인 옥타브 위잔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책을 읽는 사람을 찬양하지만, 책에 매달리며, 책의 물질성에 집착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꼬는... 그리고 <책의 종말>을 보면, 19세기말 책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옥타브 위잔은 종이책의 종말을 굉장히 높은 확신을 가지고 예측하고 있다(물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대체제는 듣는 책이다. 녹음 기술과 에디슨의 발명품 활동 사진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기술이 책 자체를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좀 다른 형태로 번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옥타브 위잔의 예측은 틀렸지만,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궁금한 것은 21세기 들면서 다른 형태로, 비슷한 예측으로 이어지고 있는 책의 종말에 관한 예측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다. 또 비슷하게 전개될까?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나는 애서광(狂)은 아니란 걸 자인한다. 책을 좋아하지만, 그것도 무척 좋아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다른 것을 걸만큼 책이라는 물질성에 걸지는 않으니 말이다. 책을 욕망하지만, 책의 내용을 욕망하지, 책 자체를 욕망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 만큼 다른지는 모르겠다. 다 읽고 나서 이 책의 내용에 흠뻑 빠졌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나도 별 다를 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나는 책을 욕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