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예술가와 사물들》
“사람은 도구-사물과 더불어 산다. 그것 없이 한순간도 살 수가 없다. 클립, 포크, 송곳, 망치와 같은 단순한 도구에서 컴퓨터나 자동차와 같은 복잡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은 사람의 필요에 부응하면서 우리의 능력, 힘, 용량을 늘리는 데 기여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은 ”의지의 표현, 힘의 확대, 작동의 아름다움“(루스 퀴벨)으로 우리 삶을 보다 편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92쪽)
장석주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자전거> 도입부에 쓴 글이다. ‘예술가와 사물들’이라고 했을 때, ‘사물’에 대해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그 ‘물성(物性)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보부아르나 김훈의 자전가라든가, 존 스타인벡과 버지니아 울프의 연필, 폴 오스터나 카프카의 타자기는 그런 물성이 진하게 느껴져 예술가와 사물의 균형이 맞춰진다. 그런데 사물의 물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에드워드 호퍼의 발레리 평전이라든가, 실비아 플라스의 가스오븐(그녀는 그 가스오븐을 켜고 자살했다), 유치환과 연애편지, 임화의 깃발 같은 것들이 그렇다. 여기서는 그냥 예술가를 얘기하기 위해 무언가 상징적인 것을 들고 나온 느낌이다. 사물보다 훨씬 예술가의 삶에 더 무게중심이 가 있다.
이런 애기를 하는 것은, ‘예술가와 사물들’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의 느낌 때문이다. 이 제목에서 나는 ‘예술가’보다 ‘사물들’을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 얽힌 사연들이 나와 또 어떤 관련성을 맺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장석주는 그 사물들을 예술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꽤 많은 예술가들(체 게바라 같은 이들이 예술가의 범주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상당히 소수다)에 대해서 썼는데(2년간 신문에 매주 연재한 것이니 당연하다), 솔직하게 많은 이름들이 낯설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더욱 예술가보다 사물에 더 관심이 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낯선 이름은 단 몇 개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장석주가 관심을 가진 것은 결국 예술가의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하고, 사연을 가진 예술가의 삶이란 걸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예술가를 규정하는 사물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정말 그 예술가는 그러기를 바랄까 싶다. 예를 들어 사무엘 베케트가 포주가 휘두른 칼로 기억되기를 원할까? 나비 박사 석주명이 만돌린으로 더욱 기억되기를 원할까 싶은 것이다. 물론 사람의 일은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할 수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한 사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대신 어떤 사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좋게.
그런데 정말 장석주가 예술가들을 잘 요약하고 있을까 싶은 대목이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그 생애를 내가 잘 모르기에 그의 단 두 페이지에 걸친 요약을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데, 내가 잘 아는 이의 생애에 와서는 그의 요약을 의심하게 된다. 하나는 올리버 색스이고, 다른 하나는 찰스 다윈이다. 올리버 색스는 뭔가 부족해 보이고, 찰스 다윈의 경우에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다른 이라면 다른 인물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신문 연재라는 짧은 지면 탓으로 넘길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왔을 때는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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