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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단절된 시대에 대한 비가(悲歌)

플로리안 일리스,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by ENA

플로리안 일리스. 이 작가의 이름은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10년 전에 읽은 『1913년 세기의 여름』은 그 어떤 역사책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분위기를 더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유럽의 ‘벨 에포크’의 감성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주었고, 제1차 세계대전을 (물론 비유적인 의미이지만) ‘따분해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깨닫게 해주었다(다시 찾아보니, 그런 표현을 쓴 게 바로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였다. 그 후로 그 의미를 이해해왔다). 그와 함께 20세기 초반의 유럽 문화의 지평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들의 고뇌와 절망, 그리고 가끔의 희망이 어떤 것인지도 이해하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내게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은 놀라운 책이었다.


10년 만에 그의 후속작이 나왔다는 소식은 나를 조용히 흥분시켰다.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읽지 못한 것은 여러 사정 탓이었다. 그 사정이 해소되자마자 집어 들었다. 『1913년 세기의 여름』의 등장인물을 거의 두 배 넘는 600명이 넘는 인물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 하나만 두고도 이 책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이 얼마나 깐깐한 기획과 방대한 자료에 기초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394권의 책을 읽고 자료 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의 조사량 자체가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이를 추적해야 할지, 그 인물을 추적하기 위해서 봐야 할 자료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이미 그 결정과 선정에서 이 책의 가치는 정해졌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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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1부의 이야기는 좀 당혹스럽다. 이 수많은 명사(名士, 요즘엔 셀럽이라고 하나?)들이 이랬다고?할 정도다. 따지고 보면 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사랑은 늘 지고지순하지 않다. 오히려 배신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가 많고, 흔히 양다리라고 얘기하는 관계들, 동성애와 양성애도 흔하다. 육체에 집착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신적인 사랑에 만족하는 이들도 있다. 아내를 뻔히 둔 상황에서, 거의 같은 공간에서 다른 여인과 침대에 함께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아, 물론 그 반대, 남편을 뻔히 둔 상황에서,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막장’이다. 제목대로 ‘광기의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플로리안 일리스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그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면서(가끔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런 행위와 마음이 옳으냐, 그르냐를 이야기하기보다 그 관계를 보여준다. 그 관계들은 양차 대전 사이의 유럽, 특히 대륙의 문화적 지평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소설가, 시인, 화가, 철학가, 테니스 선수, 심지어 나치의 수뇌부 등등 사이에 얽히고 설킨 관계가 바로 그때의, 그곳이었다.


그러다 2부에서는 분위기가 확 바뀐다. 그 계기는 1933년 1월 나치의 집권이다. 나치의 집권은 앞서의 1920년대와 1930년 초반의 유럽의 문화적 지평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작가들은, 특히 유태인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히틀러 집권의 의미를 미리 파악한 이들은 빨리 탈출했고, 조금이라도 기대를 갖거나, 혹은 다른 토대를 가진 이들은 멈칫거렸다 호되게 당했다. 절망의 시대였고, (제목대로) 증오의 시대였다.


정말 익숙한 이름의 인물도 있지만, 그래도 낯선 이름의 인물도 있다. 낯설다 생각했지만, 알고 있었어야 하는 인물도 있고, 정말 몰랐던 인물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이도 있다. 그런데 그 한 명 한 명이 그 10년 동안 어떤 행보를 걸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들 모두의 온갖 감정과 행동이 어우러진 가운데 악몽 같은 시대를 맞이했다는 게 더 중요하다. 시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다.


『1913년 세기의 여름』을 읽고 “1913년, 과거의 끝이자 현재의 시작”이라고 했는데(https://blog.naver.com/kwansooko/50189736373),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을 읽고도 그와 같이 제목을 달 수는 없을 것 같다. 여기의 시대가 끝나고,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인류가 맞이한 세계는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시기를 토대로 성립한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오히려 이 시기를 부정함으로써 탄생한 것이 우리의 현대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플로리안 일리스가 그리고자 한 것은 우리와 단절된 그 시기에 대한 송별의 비가(悲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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