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정, 『놀랍도록 길어서 미치도록 다양한 칠레』
‘칠레’하면 떠오르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렇게만 떠오르면, 외국에서 한국 하면 떠오르는 게 전쟁이라고 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좀 더 생각해보자. ‘기~인 나라’, 수도 산티아고(사실 이것도 피노체트 쿠데타를 다룬 영화 때문에 아는 것이다). 포도주. 구리, 그리고 최근에 알려진 리튬 산지... 아, 쉽지 않다. 칠레라는 나라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냥 국가명만 들어봤다는 것이고, 대충 어디쯤에 있다는 것 정도를 아는 것이지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닌 셈이다(다른 나라라고 그닥 다를 바는 없긴 하다).
내 평생 칠레라는 가볼 기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칠레 어디서 과학 학회를 연다는 얘기도 별로 들어본 적 없고, 그렇다고 다들 많이 가는 나라도 다 가보지 못한 형편에 중년 들어 난데 없이 남미의 칠레라는 나라를 불쑥 여행으로 다녀올 것 같진 않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갈라파고스 제도를 간다는 미명 하에 남미를 가는 것이지만 그럴 기회가 있을 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래서 이렇게 책을 읽는다. 가보지 못한 나라를 마치 가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책을 읽는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칠레는 ‘미친 지리’의 나라다. 평균 117km의 폭에 남북으로 4,300km에 달하는, 지구 상에서 가장 좁고 긴 나라다. 그만큼 다양한 기후대에 걸쳐 있다. ‘미친 지리’는 그것만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데스 산맥이 동쪽으로 가로막고 있어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에 위치에 있어 다른 남미 국가들과는 다른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구리와 리튬의 세계적 산지다. 물론 이것은 칠레의 표면적인 모습이다.
이 책에서 칠레가톨릭대학교에서 17년 동안 교수 생활을 한 저자는 칠레의 요모저모, 구석구석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앞서 말한 지리적 측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로부터 비롯된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다.
몇 가지만 인상적인 것(사실은 잘 몰랐던 것)을 읊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다른 남미 국가들과는 다르게 매우 유럽적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남미가 아니라 유럽인이라고 여기는 칠레인이 많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유럽의 문화가 깊게 자리를 잡고 있어, 오히려 원주민이 더 고립되고, 계급이 고착화되어 있고, 빈부 격차가 크게 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페루, 볼리비아와 전쟁까지 치렀던 경험 때문에(그로 인해 칠레는 구리, 리튬 산지를 얻었고,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가는 길을 잃었다)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와는 정반대의 관계라는 것은 잘 몰랐다. 이웃 나라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기 마련인데, 아르헨티나가 칠레의 독립을 도왔다는 것 말고도 안데스 산맥이라는 지리적 격리가 그런 관계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놀라운 것은, 남녀의 관계다. 남미가 마초이즘이 성행하는 지역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결혼관이라든가, 남녀 관계에 대한 생각이 현재의 우리와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고루하고, 전근대적이고, 또 시민 결합 등을 폭넓게 인정하는 것을 보면 또 아니고... 이름의 성을 쓰는 법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다. 현재 대통령의 전체 이름은 베로니카 미첼 바첼레트 헤리아인데, 바첼레트는 아버지, 헤리아는 어머니 성이다. 그녀는(아, 여성 대통령이다) 이혼녀이면서 미혼녀인데, 전 남편과 낳은 두 자녀는 다빌로서 바첼레트라는 성을 쓰고, 이혼 후에 만난 연인과 낳은 아이의 성은 엔리케스 바첼레트라고 한다. 물론 그녀가 이혼녀이고 미혼녀라는 사실은 대통령 선거에서 아무런 이슈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밖에 칠레에서는 커피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칠레 커피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없지만). 당연히 포도주는 유명하니 더 언급할 필요도 없고.
칠레를 한 일 주일 동안 다녀온 느낌이다. 물론 그곳의 냄새를 맡지 못했고, 그곳의 바람을 느끼지 못했지만(그래서 공중에서 비행기를 타고 휘휘 돌며 바라본 느낌이다), 그래도 칠레라는 나라가 한층 가까워졌다. 또 모른다. 정말 내년 쯤에 칠레의 산티아고의 어느 시장에서 형형색색의 단맛 가득한 과일을 고르고 있을지. 칼 세이건은 “책이 시간의 족쇄를 끊는다”고 했는데, 책은 공간의 족쇄도 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