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 『부처스 크로싱』
『스토너』를 읽은 게 2016년 1월이었다. 읽고 쓴 글에 “특별한 장면을 갖는 평범한 삶”이라고 제목을 붙였었다. 공감이 가는 답답한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기억한다. 특별한 장면이 있지만, 그것들을 모아보면 그저 평범한 삶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스토너의 삶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특별한 장면을 가지는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존 윌리엄스라는 작가를 알았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던 존 윌리엄스는 비록 전미도서상을 수상했지만,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다. 그가 죽고 10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유럽에서 『스토너』가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이 된 셈이었다. 그는 평생 단 네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첫 번째 작품이라는 『오직 밤뿐인』은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전쟁터의 텐트 속에서 쓴 작품이었고, 어쩌면 미숙한 나이에 쓴 미숙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는지 평생 멀리 했다고 한다. 그러고나서 10여 년이 흐르고 난 후 1960년에 발표한 작품이 바로 『부처스 크로싱』이다. 그러니까 존 윌리엄스의 입장에서는 진짜 소설가로서는 첫 작품이라 여겼을 작품인 셈이다(이후 1965년에 『스토너』, 1972년에 『아우구스투스』를 발표했다. 그게 전부다).
1870년대 하버드에서 3년을 다니다 관둔 윌 앤드루스가 서부의 황량한 마을 부처스 크로싱에 발을 디디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는 서부를 경험해보고자 대륙의 절반을 넘게 횡단하여 온 것이었다. 그가 만난 이는 들소 사냥꾼 밀러. 밀러는 다른 사람은 가보지 못한 콜로라도 대평원에 들소 떼가 있다며 앤드루스를 사냥대에 합류할 것을 제안한다. 항상 밀러와 함께 하는 찰리 호지와 가죽을 손질할 슈나이더와 함께 긴 여정에 돌입한다.
이후로는 그들이 죽도록 고생한 이야기다. 물이 떨어져 간신히 버티다 물을 찾아내 살아난 이야기, 결국은 들소 떼를 찾아내 학살하듯 들소들을 죽이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가죽을 벗겨내는 이야기, 들소 사냥에 과몰입하다 돌아갈 때를 놏쳐 눈에 갇혀 수 개월을 눈 속 아지트에서 버텨내는 이야기, 돌아오다 세찬 강물을 만나 슈나이더가 죽고, 가죽을 몽땅 잃어버리는 이야기. 그리고 부처스 크로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들소 가죽의 시세가 떨어져 버려 그들의 죽도록 한 고생이 아무런 물적 가치가 없어져버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앤드루스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아가는 것일까? 바로 이것이 존 윌리엄스가 정말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쫓았던 가치, 즉 들소의 가죽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평원에 남겨 두었던 가죽의 가치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밀러는 가죽 장사꾼 맥도널드의 가죽마저 불사르고 만다. 삶에서의 절대적가치라 믿었던, 그런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삶에서 집착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가치라 믿는 것들 역시 결국은 상대적인 가치다.
그런데 앤드루스는 거의 수동적으로 사냥대의 일원으로서 맡겨진 일을 한다. 그가 먼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혹은 밀러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내거나 행동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 첫 장면에 부처스 크로싱에 들어오는 것과 함께, 마지막에 부처스 크로싱에 돌아온 이후 함께 지내던 창녀 트랜신을 떠나는 장면만이 그가 주체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다. 서부로 들어왔다 서부에서 나가는 결정만이 앤드루스에게는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먹물들의 특징이다. 하버드 대학생이었던 앤드루스가 서부의 삶을 통해서 끊어내고자 했던 것은 그런 먹물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악조건을 견뎌내고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는 부처스 크로싱을 떠나며 부처스 크로싱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마 그곳에서 깨달은 모든 것을 두고 가면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존 윌리엄스의 문장이다. 『스토너』가 한 인간의 평범한 삶을 그려내는 소박한 문장이었다면(물론 이 작품이 『스토너』보다 먼저 발표한 작품이긴 하다), 여기의 문장은 밀도가 높다. 장엄한 대평원의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호화스런 단어와 늘어지는 문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존 윌리엄스는 소설 내내 인내심을 발휘하듯 내달리지 않고 필요한 단어만으로 장엄함을 표현해내고 있다.
아쉽다. 이제 존 윌리엄스의 작품으로 더 이상 읽을 게 없어졌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