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A Sep 16. 2024

원자폭탄, 현실과 도덕적 딜레마

에번 토머스, 『항복의 길』


핵분열을 이용한 가공할 무기의 가능성이 알려지자 나치가 먼저 개발할 것을 우려한 일련의 과학자들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설득해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다. 그로브스 장군이 관리하고 오펜하이머를 책임자로 미국과 유럽에서 망명해온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에 독일은 항복하고, 남은 것은 일본이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그리고 3일 후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항복을 선언한다.      


역사를 무미건조하게 서술하면 이렇다. 그런데 이후 많은 질문과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가장 중요하고 빈번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원자폭탄을 써야만 했던 것인가? 군인과 민간인, 군사시설과 민간시설을 가리지 않고 피해를 준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을 쓰지 않았다면 무고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작가이자 기자 에번 토머스의 결론은 다르다. 바로 그때 원자폭탄이 있었기에 인명 피해를 수많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바로 그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심적 갈등을 겪으며 결정을 해야 했으며, 설득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항복의 길』은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할 것이 예감되고,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되던 1945년 3월부터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기까지를 설명한다. 앞서 얘기한 심적 갈등과 결정과 설득의 기로에 섰던 세 명이 중심이다. 미국의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육군항공대의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 칼 스파츠, 그리고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스팀슨은 원자폭탄 개발과 투하의 책임자였다. 칼 스파츠는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지휘했다. 도고는 일본의 패망을 인정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국체(천황제)를 보존하고 많은 일본인을 살리는 길이라 믿었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결사항전이었다.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데만도 5만 명이 넘는 미군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은 이른바 ’1억옥쇄‘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었고있었고, ”일본에 민간인은 없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점령을 시도한다면 50만 명에 이르는 미군 사망자가 나올 것이 예상되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에 의해 일본 본토(도쿄를 포함하여) 소이탄 폭격을 하고 있었지만(이에 관해서는 말콤 글래드웰의 『어떤 선택의 재검토』 참조), 더 충격적인 무력 시위가 필요했다.  

    

스팀슨은 미군의 희생과 일본 민간인의 희생이 함께 어른거렸다. 결정을 내려야만 했고, 그 결정은 우리가 아는 바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악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맨 처음 올라온 폭탄 투하 지역에서 일본의 고도(古都) 교토를 끝까지 거부하고 제외시켰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부터 항복만이 일본이 살 길이리라 여겼던 도고는, 애초에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소련이 종전을 중재해 줄 것을 믿었지만 순진한 기대였음이 드러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가공할 핵무기는 그에게 오히려 기회였다. 그는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난 아나미 고리체가와 군인들에 맞서며 결국은 천황을 설득해 항복 선언을 하도록 한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천황이 항복을 결심한 이후 5일 동안 일본 군부는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그들은 히로히토가 낭독한 항복 선언문 녹음 테이프를 찾기 위해 황궁을 장악하기까지 했다. 녹음 테이프는 궁녀들의 방에 숨겨져 있어 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긴박하고 혼란스러운 항복 선언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히로시마에 폐허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마치 그들이 피해자인 양. 폭탄이 휩쓸고 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모습과 피해자들의 증언은 그야말로 소름 끼친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과학의 폭주를 경고한다. 그런데 ‘다시는 그런 일’에는 어디까지를 포함하는 것일까?   

   

에번 토머스는 <후기>를 통해, 원자폭탄이 미군 50만을 살린 것보다 더 큰 것은 수백 만 명의 일본인을 살렸다고 평가한다. 11월 1일의 규슈 침공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대신 철도 폭격과 열도 봉쇄를 통해 일본인을 굶기는 작전이 보다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수백 만 명의 일본인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 내부의 혼돈으로 내란으로 치달았을 가능성도 있다. 소련은 이미 참전하고 만주를, 일본 북부에 진격한 상황이었다. 또한 일본의 동남아시아 지배가 몇 달이라도 더 지속되었다면 그 지역의 인명 피해는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핵폭탄은 엄청난 희생을 초래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훨씬 더 큰 대재앙을 막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은 그들이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켜서 단죄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쿄의 전범 재판은 ‘승자의 정의’일 뿐이고, 자신들이 단지 패배했기 때문에 기소되었다고 여겼고, 지금도 그렇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히로히토는 항복 선언문에서 이렇게 읽었다.      


“적은 새롭게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잇따라 살상하여 그 참해(慘害)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계속 싸우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문명까지 파각(破却)할 것이다.” 

“짐은 시운(時運)을 따라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열고자 한다.”      


그들은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작가의 이전글 태양을 만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