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 『평등의 짧은 역사』
2014년 초였나. 한 경제학자의 이름과 그가 쓴 책이 마치 ‘유령처럼’ 번역되기도 전에 국내에 소개되고 있었다. 그에게는 ‘21세기의 마르크스’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고 했고, 그의 책은 과격하지만 놀랄 만큼 실증적이라고 했다. 잊혀질락 말락 할 즈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부리나케 사서 읽었다. 경제학자의 이름은 토마 피케티였고, 책 제목은 『21세기 자본』이었다.
각종 데이터에 기초해서 부의 편중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었다. 인상 깊었지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카를 마르크스’의 통찰력과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실증적 경제학자였다. 다만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통계와 주장은 분명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10년이 지나고 다시 그의 책을 읽는다. 그 사이 그의 책은 몇 권이 더 번역되었지만, 토마 피케티라는 경제학자의 주장이 『21세기 자본』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이 될 수는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으면, 단순한 변주만으로 책 한 권을 쓰지는 않았을 거란 짐작이 생겼다. 그렇게 『평등의 짧은 역사』를 읽게 되었다.
제목부터 생각해보면, 왜 ‘불평등’이 아니고 ‘평등’인지 궁금했다. 그가 지금의 사회 구조를 평등한 사회 구조가 아니라고 여기는 경제학자라면 평등보다는 불평등에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짧은 역사’라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평등의 역사가 짧다는 뜻일까? 평등에 관한 간략한 역사라는 뜻일까? 이 중의성은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된 것일까?
나의 자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분명 불평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또한 ‘평등의 역사’ 또한 다루고 있다. 1780년 이후 불평등이 개선되면서 보다 평등해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데이터가 말하는 바다. 분명 세계는 평균적으로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의 ‘평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평등의 정도는 어떻게 얻어진 것인가? 바로 집단적 투쟁에 의한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그냥 얻어지고, 주어진 게 아니라 쟁취해낸 것이라는 점.
피케티는 그렇게 전제해 두고서, 실은 불평등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여러 관점에서 불평등의 상태를 진단하고 있으며, 그 불평등이 유지되고 있는(혹은 평등이 충분하지 않는) 이유를 맹렬하게 탐구하고 있다.
그가 분석하고 있는 불평등의 지표들은 여러 가지다. 한 국가 내에서 소유 집중의 문제,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유산으로 생겨난 국제적 불평등의 문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의 문제, 누진세의 문제(누진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진세가 다시 완화되고 있는 문제), 교육의 불평등, 계급과 계층 사이의 불평등 등. 수십 개의 그래프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떻게 완화되다 1980년대 이후 다시 악화되고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시 불평등의 문제는 심각하며, 정말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이 문제를 들여다보는 핵심적인 관점은 무엇일까? 피케티는 단언코 바로 권력관계가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권력과 지배계급의 힘에서 불평등이 비롯되고 유지된다. 따라서 평등은 그러한 불의에 맞서 쟁취하는 집단적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인상적인 점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해서 짧지 않게 쓰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이 과거 노예제와 식민주의를 통해 부를 축적해왔으면, 그것을 지금은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행해지는 원조의 형태가 아니라 배상의 문제이며, 국제세 같은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꿈꾼다. 과거의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나 현재의 중국식 사회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관계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꿈꾼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민주적이고, 연방제적인, 분권화되고 참여적인, 환경적이고 다문화적인 사회주의”다. 이 사회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수반한다.
“사회적 국가와 누진제의 확대, 기업 내 권력 분유, 포스트식민주의 배상, 차별 철폐, 교육 평등, 개인 탄소 카드 도입, 점진적인 경제의 탈상품화, 고용 보장, 모두를 위한 상속, 화폐적 불평등의 대폭 축소 등”
이를 몽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되지도 않을 일을 꿈꾸고만 있다고.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극한적 불평등이 지금만큼이라도 평등한 방향으로 진전된 것이 바로 역사다. 아마도 그때도 지금과 같은 평등은 몽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지구와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고 윤택하게 사는 방향이라면 충분히 꿈꿀 가치가 있고, 지침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