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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Sep 29. 2024

'길고 쓸모 있는 삶', 벤자민 프랭클린

에릭 와이너, 《프랭클린 익스프레스》

매년 11월 말쯤 되면 나는 한 가지 일을 한다. 거의 20년이 되었다. 내년 다이어리를 주문하는 일이다. ‘다이어리’라고 했지만, 언제나 똑같은 브랜드다. 거기에는 ‘프랭클린 플래너’라고 특별한 이름이 붙여져 있다. 프랭클린, 그는 계획의 화신이다. 혹은 기록의?     


TV에서 미국, 혹은 세계 경제를 언급하는 장면에서 지나가듯 등장하는 얼굴이 있다. 미국 밖에서 2/3가 쓰인다는 100달러짜리 지폐의 인물. 벤자민 프랭클린. 살집이 있는 그의 얼굴은 분명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그런데 벤자민 프랭클린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인쇄업자이자 출판업자였다. 그의 풍족한 삶은 바로 그 직업에서 왔다. 그러나 그는 작가였으며, 발명가였고, 과학자였다. 끊임없이 풍자적인 글을 썼고, 피뢰침과 이중 초점 안경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여행가였으며, 외교관이었으며, 혁명가, 입법가였다. 대서양을 여덟 차례나 건넜으며, 영국에서 수십 년을 지냈고, 독립 전쟁 때는 프랑스 주재 대사 노릇을 했다. 그리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냈다. 제헌의회 대표로 대표들끼리의 대립을 중재하고, 결국은 타협의 산물인 미국 헌법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셀럽이었고, 인플루언서였다. 아마추어였지만 과학적 업적과 발명 등으로 얻은 명성이었고, 그 명성을 그는 매우 적절하게 써먹었다. 명성을 자신을 위한 일에만 쓰지 않고, 세상을 쓸모 있게 만드는 데 섰다. 특히 공화국을 만드는 데 써먹었다.      


1790년, 그가 죽자 주치의였던 존 존슨은 “그는 84년 하고도 석 달의 길고 쓸모 있는 삶을 마감하며 평온히 영면에 들었다.”라고 했다. 그는 오래 살았다. 지금 봐도 짧은 삶이라고 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긴 삶이었다. 그가 특히 오래 산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60을 넘긴 다음에도 젊었을 때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열렬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은퇴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단순히 길고, 활발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삶을 살았다. ‘쓸모’는 그의 삶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했는지에 대한 가장 최종적인 판단 근거는 다름 아닌 쓸모, 효용성이었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삶의 지혜를 찾았던 에릭 와이너는 이번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에서 삶의 방편을 구한다.      


프랭클린은 누가 뭐라해도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비누제조업자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나, 겨우 2년 동안 학교 교육을 받았지만, 독서와 경험을 통해서 자수성가하여, 끝내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영국 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왕당파에서, 결국은 미국 독립을 염원하는 혁명가로 변신하였으며, 공공도서관, 병원, 의용 소방대, 펜실베니아 아카데미(지금의 펜실베이나 대학교)와 같은 공공기관을 설립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국가와 사회의 토대를 세운 인물이니 그를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프랭클린의 자취를 따라가는 에릭 와이너는 단 한 차례도 ‘벤자민’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벤’이라는 애칭을 쓰면서 그를 친근하게 대한다. 프랭클린이 저 멀리, 저 높이 존재하는 위인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그때그때 삶의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조금 현명한 아저씨인 양. 그래서 벤이 썼던 수많은 경구들이, 그가 생애 굽이굽이에 결정했던 결정들이 마치 나에게 직접 조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릭 와이너는 그의 오점도 끈질기게 추적한다. 왕당파로서 아버지의 반대편에 섰던 아들 윌리엄과의 불화가 대표적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프랭클린은 아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에릭 와이너는 그토록 너른 마음을 가져서 적들까지도 포용하려 했던 그가 아들에게만큼은 그랬던 것에 대해 끝내 수긍하지 못한다. 그리고 노예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토머스 제퍼슨 만큼은 아니지만 프랭클린도 노예를 소유했고, 자신의 신문에 노예를 광고하고, 노망친 노에를 찾는 기사를 써서 돈을 벌었다. 물론 그는 노년에 들어서 노예제에 대해 회의했고, 죽기 직전에는 완전한 반대론자가 되었지만 노예제에 대한 태도는 적지 않은 사람에게 의구심을 던지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밖에도 그는 속임수를 쓴 적이 있고(정직이 최대의 방책이라고 했지만), 아내에게 냉담하기도 했고(영국 생활 중 아내 데보라가 죽어가는데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자 문제도 영 꺼림칙하다.   

   

에릭 와이너는 이런 오점까지도 이야기하며 우리가 그렇듯, 프랭클린과 같은 위인도 “특정 시공간에 갇힌 포로”라고 한다. 그는 그 시대의 모든 편견과 오류를 그대로 물렸 받았고, 우리는 그런 것을 비판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인은 모든 면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면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으로부터도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프랭클린은 그럴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인물이다. 세속적이면서도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 원리 원칙이 분명했지만, 거기에만 갇혀 있지 않고 유연했던 인물, 이론보다는 경험을 중시했던 인물. 멀리서 우러르기보다는 곁에서 맥주라도 한 잔 같이 하고 싶은 인물. 에릭 와이너가 소환하고 쫓아간 인물은 그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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