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뤼크, 『자살의 언어』
삶의 의미를 보다 풍부하고 정확하고 가치 있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결정권자로서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 스스로 내 목숨을 결정하게 되는 것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포괄적으로 자살이라고 부른다.
잊고 있던 죽음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외삼촌은 마당 한 귀퉁이 나무에 목매달고 죽었다(고 한다). 나도 어렸지만, 외삼촌도 나이가 많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고, 이후로도 단 한번도,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외가를 가면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었고(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집 자체의 구조가 바뀌면서 뽑혔지만), 부모님, 외삼촌, 이모 모두 막내가 과연 존재했었는지 잊었던 것처럼 보였다. 외삼촌은 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렸을까?
나도 거의 완벽하게 잊고 있었던 외삼촌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풀 수는 없었다. 그가 남긴 글 조각 하나 보지 못한 것은 물론,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실제로는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니.
그래도 이렇게 떠오르는 걸 보면 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실은 그밖에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주변이 또 있고, 사회적으로도 그런 뉴스를 적지 않게 접해 왔기도 하다. 모두 저만의 이유를 가지고 자기 목숨을 버렸지만 거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른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한다. 또한 비슷한 방식의 죽음이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다른 조력사에 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회적 논쟁이 여전할 뿐만 아니라 점점 고조되는 양상이다.
스웨덴 카롤린스카대학교의 정신과 의사 크리스티안 뤼크의 『자살의 언어』는 에세이 형식지만 자살과 조력사에 관한 경험과 성찰을 담고 있다. (내가 외삼촌의 자살을 떠올리게 한 중요한 트리거가 된) 고모의 자살을 열한 살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녀 역시 고모의 죽음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이 문제에 관한 평생을 연구하고 고민해온 전문가가 그럴진대, 나는 오죽하겠나 싶다). 자살하거나 시도한 사람의 시각뿐 아니라, 자식을 떠나보낸 사람의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보고, 역사와 문화 속에서 벌어진 여러 자살에 대해서도 숙고한다. 죽음은 시대마다 사회마다 문화다다 비슷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살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조력사로 이어진다. 아주 명쾌하게 정리된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내 삶을 결정할 권리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조력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긍정적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으로 논의가 심도 깊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다만 종교에서 신이, 혹은 신적 존재가 그러라고 해서, 라는 식의 논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토론이 필요하다. 이런 토론은 삶의 지속성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의 가치, 나의 생이 존속하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나아가 어떻게 하면 자살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력사에 대한 토론은 오히려 자살을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적극적인 조력사에 대해서 조금은 부정적인 뉘앙스다. 그러나 그에 관한 조사와 논의를 통해서, 내가 앞서 예상했던 대로 자살을 줄이고 방지하는 방안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라면 적극적인 대화와 치료 같은 것을 얘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 놀라우면서도 신선함을 느꼈다. 긍정적으로 상담한 환자가 바로 다음 날 자살한 사례를 접하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보다는(정신과적 해결책이 무의미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른 방식의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효과적인 해결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워싱턴 DC 인근에 서로 가까운 두 개의 다리가 있고, 어느 한 다리에서 자살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도시에 있는 열 개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람의 절반이 이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1986년 이 다리에 울타리를 설치해서 뛰어내리기 힘들게 만들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겨우 몇 발짝 옆의 다리로 옮겨가 뛰어내릴 것 같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울타리가 설치된 다리에서 자살이 급격하게 감소했고, 옆의 다리에서도 자살은 증가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뤼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어차피 항상 새로운 방법을 찾기 마련이니 스스로 묵숨을 끊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게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자살을 방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시사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 읽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내 삶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생각이 더 강해졌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죽음을 결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게 된다. 조력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혹시라도 결국 그 길을 간다고 해서 내 삶을 버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 행복하게 이 삶을 마감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