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혜심, 『매너의 역사』
데코룸, 쿠르투아지, 시빌리테, 폴라이트니스, 에티켓.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지금까지 매너와 관련한 핵심어다. 이것을 지금의 매너와 등치시킬 수도 있고, 조금은 다른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 다른 의미 자체가 그 시대에 매너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Manners Maketh Man).”이란 말은 영화 <킹스맨>에 사용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원래는 14세기 영국의 주교였던 위컴의 윌리엄이 맨 처음 쓴 말이라고 한다. 웬체스터 스쿨을 설립하면서 학교의 모토로 삼은 문장인데, 여기서 매너는 단순하게 정중한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전인적인 인간을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매너’가 얼마나 폭넓은 의미로 쓰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설혜심 교수는 바로 이 폭넓고, 또 애매하달 수 있는 매너에 관한 다채로우면서도 의미 있는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미 『인삼의 세계사』, 『소비의 역사』, 『그랜드투어』 등으로 역사에 대한 넓으면서도 깊은 시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매너에 관한 이야기도 충분히 기대해볼 수 있었다.
매너, 혹은 매너로 포괄할 수 있는 각종의 규칙과 태도들에 대해서 시대별로 엮어가고 있는데, 그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다.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변곡점은 세 번 정도로 추려지는데, 첫 번째는 매너가 계급적 구별 짓기의 강력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바로 키케로에 의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매너, 내지는 매너의 강요가 갖는 효용 가치는 계급이나 계층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하지만 계급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매너는 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그 관련도가 떨어지고, 보다 폭넓은 계층을 대상으로 한 매너로 바뀌어 왔는데...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퇴행이 일어난다. 보다 넓은 계급, 계층을 포관하면서 단순한 의례를 넘어서 마음가짐, 도덕으로 받아들여지던 매너가 에티켓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계급적인 의미를 지니며, 세세하고 엄격한 것으로 축소된 것이다. 설혜심은 에티켓에는 ‘도덕’이라는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세 번째 변곡점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흐름이다. 매너가 계급, 계층 사이에 통용되던 것에서 개인의 것으로 바뀐 것이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관계에 필요한 매너가 필요해졌는데, 이것들은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되었고, 과거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던 상황에까지 매너가(혹은 에티켓이) 고개를 들이민 상황이 되었다.
설혜심 교수는 매너는 ‘포섭과 배척’의 모순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쓰고 있다. 기성의 권력은 쫓아오는 계급, 계층을 따돌리기 위해 매너의 형식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집단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동질성을 강화했다. 하지만 신분질서가 요동치는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계급에 손 내밀 수밖에 없었고, 이런 때는 매너의 양식이 바뀌기도 했다. 이것은 지금 봐서도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매너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 것일까? 설혜심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매너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과 교류를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이자 즐거움을 주는 장치이고, 사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공공선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였다.” 물론 이것은 매너의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한 시각이다(책 전체에 걸쳐 설혜심 교수는 매너의 부정적 측면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매너의 형식과 의미가 변했을 지언정, 매너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매너의 특징 중 하나로 예절의 쇠퇴가 법률의 강화로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매너가 감당해야 할 부분은 적지 않다. 『매너의 역사』는 과거의 예절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현대의 매너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인류가 매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이야기 있다.
아쉬운 점을 들자면, 설혜심 교수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유럽, 특히 영국에 한정된 얘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아쉬운 지점이긴 하지만, 저자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도 하고, 자신의 역량 하에서 최선을 다한 저작이란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사실 그게 힘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