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지, 《파란색 미술관》
파란색은 미셸 파스투로가 얘기했듯이 중세에서, 근대, 그리고 현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선호도가 높아진 색이다(https://blog.naver.com/kwansooko/221486183196). 카이 쿠퍼슈미트는 《블루의 과학》에서 파란색과 관련한 역사와 과학에 대해 쓰면서 결국은 ‘파란색은 귀하다’고 했다(https://blog.naver.com/kwansooko/222183879103).
그런데 파랑, 파란색은 묘한 색이다. 강민지가 《파란색 미술관》의 프롤로그에 쓰고 있듯이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모두 갖는 색이다(‘청신호, 청사진, 블루오션’의 파란색과 우울, 고독, 차가움, 냉정, 슬픔, 불안을 나타내는 파란색). 파란색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화가들이 파란색은 감정을 나타내는 데 매우 즐겨썼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다. 그래서 풍경을 그리면 파란색을 쓸 수밖에 없다. 밤의 색깔도 파랗다. 그러니 밤을 그리면 역시 파랗다. 어떻게 파랑을 표현하는지만 다르다. 강민지는 파란색의 그림을 중심으로 열다섯 명 화가를 쫓고 있다. 거기에는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투영된 그들의 삶과 생각, 감정이 있다.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알고 있던 이야기도 있지만, 알지 못했던 이야기도 있다. 봤던 그림도 많지만, 보지 못했던 그림도 적지 않다. 봤던 그림도 자세히 보지 못했던 그림도 많고, 달리 보이는 그림도 있다. 파란색의 그림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파란색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그림도 소개한다. 그게 화가의 삶과 화풍의 변화에서 중요하다면.
가장 새롭게 본 화가는, 의외로 빈센트 반 고흐다. 그렇게 잘 알려져 있고, 많은 그림을 봤을 텐데도 새로움이 보인다. 반 고흐의 그림을 생각하면 해바라기가 떠오르면 강렬한 노란색이 생각난다. 그가 파란색의 화가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를에서 그린 그림들을 보면 파란색 천지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는 파란색을 즐겨 썼다. 그에게 파란색은 긍정적 색깔이었다.
반면 뭉크의 파란색은 반 고흐의 파란색과 전혀 달랐다. 뭉크의 파란색은 거의 언제나 우울했다. 둘 다 <별이 빛나는 밤에>란 제목의 그림을 그렸는데(뭉크가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난 후 그렸다), 얼마나 다른 밤인지...
가족을 많이 그림 화가들이 있다. 호아킨 소로야가 그렇고,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가 그렇다. 여기서 아내는 모두 흰색 드레스를 입고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한쪽의 삶의 환희가, 다른 쪽의 우울한 관계다. 화가들의 붓이 얼마나 오묘한지를 깨닫게 한다.
또 한 가지 곁가지로 느낀 게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이란 그림에 대해서인데, 에드워드 호퍼의 장을 들어가면서 보여주는 그림(일부)과 뒤에 설명하면서 보여주는 그림(전체)을 보면서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모습만 보여주었을 때는 앞만 보는 무표정한 사람들이 쓸쓸해 보였는데, 전체를 보여주는 그림에서는 이 그림의 중심이 사람이 아니라 해가 난 파란 하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니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달라 보인다. 그림은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