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하라 마리, 《프라하의 소내시대》
우연히 어느 유튜버가 2024년에 읽은 책 중 인상 깊은 책을 소개하는 데서 알게 되었다.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는 2006년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도 그해다(일본에서는 2001년). 2024년에 나온 책은 아니란 건 알았는데, 그리 오래(?)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출간된 지 꽤 된 책을 이렇게 만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소녀시대’란 말이 너무 한국스러워서(!) 원제를 찾아봤다. 일본에서 출간될 때의 제목은 책의 2장 제목인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이었다. 1장의 “리차가 본 그리스의 창공”이나 3장의 “하얀 도시의 야스나”가 한정된 지역을 의미하는 단어가 들어 있어서 2장의 제목이 더 보편적이라 여겼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말로 번역되면서는 ‘프라하’라는 더 제한된 지역명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프라하’는 세 이야기를 모두 포괄한다.
요네하라 마리는 1960년대에 10대 초반 5년 동안 프라하에서 지냈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지금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지만)의 수도, 프라하. 일본 공산당 소속이던 아버지가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라는 이론지의 일본 대표 편집위원으로 파견되면서 함께 가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현지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닌다. 저자는 50여 개국으로부터 온 또래 아이들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우정을 나눈다.
공산주의 국가의 수도에서 국제적 기관의 자제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다고 하면, 굉장히 이념적인 교육이 이뤄졌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당시는 물론 소련이 동구권에 대한 지배력이 ‘프라하의 봄’ 이후와 같지는 않을 때였다(동유럽 국가들이 ‘동유럽’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프라하의 봄’은 요네하라 마리가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이고, 그 때문에 그녀는 당시에 사귀었던 친구들의 소식이 더욱 궁금해졌다. 편지를 주고받다 이러저런 사정으로 연락이 끊기고, 그렇게 세월이 흐른다.
저자는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스 출신의, 그러나 그리스에서 태어나지도, 단 한번도 그리스 땅을 밟아보지 못한 몽상가 리차. 루마니아 특권층의 딸로 거짓말을 일삼았던 아냐,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즉 ‘하얀 도시’ 출신으로 모든 면에서 뛰어나면서 시크했던 야스나. 그들의 현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 현재라고 해봐야 1990년대 초반이기에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어수선한 시기였고, 위험하기도 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으로 더욱 위험했다. 그들의 생사도 궁금했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에 궁금했지만 풀지 못했던 의문도 풀고 싶었다.
푸른색, 빨간색, 흰색으로 대표되는 세 친구의 현재는 과거에 그녀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다.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리차는 의사가 되어 독일에서 살고 있었고, 루마니아의 애국자를 자처했던 아냐는 특권층의 혜택을 이용해 영국으로 탈출해서 영국 남자와 결혼해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화가를 꿈꾸었던 야스나는 유고연방의 마지막 대통령이 지낸 아버지를 전쟁터에 두고 나와 지내고 있었다. 모두 동유럽의 현대사를 받아안거나, 혹은 회피하거나... 어쨌든 그 역사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난하고 아픈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간의 긍정적 모습이 담겨 있다.
요네하라 마라가 기억하고, 또 만난 세 친구의 면모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으면서도 깊게 느낄 수 있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요네하라 마라도 알 수 있다. 요네하라 마라라는 작가(러시아어 통역가로 맹활약했다고 한다)의 필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저 솜씨가 아니라 삶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글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가 정갈하고 얌전하다면 요네하라 마라의 에세이는 서사적이고, 스피디하다. 세심함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