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콘래드, 《어둠의 심연》
조셉 콘래드는 선장으로서 콩고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어둠의 심연》을 썼다(단편 <진보의 전초 기지>도 포함). 그 경험은 그의 인생과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당연히 소설에도 반영되어 있다. 당시 콩고는 벨기에 지배 하에 있었는데, 벨기에라는 국가의 식민지가 아니라,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영지였다. 콩고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참혹한 식민 지배를 경험했다고 한다.
《어둠의 심연》은 영국에서 출항을 기다리던 말로라는 경험 많은 선원이 동료들에게 자신이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겪은 일, 그리고 강의 상류에서 커츠라는 인물을 만났던 일을 들려주는 형식의 소설이다. 콘래드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야만인으로 여기는 유럽 제국주의가 오히려 더 야만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로가 콩고에 도착해 본부장과 함께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는 커츠라는 교역서를 운영하는 상사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원래 커츠는 놀라운 능력으로 엄청난 양의 상아를 조달하면서 회사에 커다란 이익을 남겨줬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시점부터 상아를 보내지 않고 있었으며, 그를 만나 상아를 되찾아오는 것이 목적이다. 지금은 상아를 위한 밀렵은 불법이지만(지금도 행해지지만), 당시에는 흔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큰 이익을 남기는 장사였다(플라스틱 발명이 상아를 대체하면서 코끼리의 멸종은 막거나 늦췄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로는 그야말로 ‘어둠의 심연’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커츠는 변해 있었다(‘문화적 배신’). 유럽의 최고 교육을 받은 문명인 커츠는 밀림에서 야만에 동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문명을 거부하고, 잔혹하고 이교도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다(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짙게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본부장과 동행하는 순례자들이 그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미 그들은 그보다 더한 야만성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의 심연’은 깊은 밀림을 의미하기도, 커츠의 내면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유럽 제국주의를 의미한다(나는 그렇게 읽었다).
커츠는 병에 걸린 상태였고, 기선으로 옮겨졌으나 탈출하고 죽어간다. 말로는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커츠는 ‘비열한 호소, 거대하고도 역겨운 욕망, 영혼의 야비함, 고통과 격렬한 고뇌’를 남기고, “끔찍하다! 끔찍해.”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하면서 죽어간다. 무엇이 끔찍하다는 것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끔찍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하게 된다. 콘래드는 이렇게 독자들에게 많은 공간을 남겨주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해 여러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가 여전히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든가, 여성주의 관점에서 여성을 매우 비하하거나 수동적 존재로 바라보았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 소설이 19세기 말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가 여전히 흑인들을 미개하다고 보고, 야만적이라 여겼고 소설에도 반영되어 있지만, 당시의 시각으로 봤을 때 콘래드의 관점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현대적인 반인종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조셉 콘래드라는 소설가가 아니라)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 자체는, 우리가 지금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를 되새겨야 하기에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여성주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제목은 민음사 번역에서 ‘암흑의 핵심’으로 되어 있다. 로버트 P. 왁슬러의 《위험한 책읽기》에서도 ‘암흑의 핵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어둠의 심연’이 내용에 훨씬 부합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