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천 개의 파랑》
이 소설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소개 문구는 ‘2020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젊은(사실은 전 세대를 통틀어서도) 대표적인 SF 작가라고 한다면 김초엽과 천선란을 드는데, 김초엽이 2018년(2회) 중단편 대상을 받았고, 천선란이 바로 《천 개의 파랑》으로 4회 장편 대상을 받았다. 한국과학문학상의 위상은 바로 이런 작가들로 세워지고 있다.
솔직한 얘기를 하자면 SF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수상 소감을 보니 천선란도 그랬다고 했으니 커다랗게 흉잡힐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뻔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기억나는 SF 소설을 들라치면,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바로 떠오르고, 테트 창과 르 귄의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도 생각난다. 더 읽었을 수도 있지만 떠오르는 건 그 정도에 그친다(물론 SF의 정의가 분명한 건 아니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런데 SF 소설이라는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 소설이 ‘과학’보다는 ‘문학’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었다. 다 읽고 책 뒤쪽의 심사평을 읽어보니 이게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심사위원만이 아니라 보통의 독자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이 작품이 왜 읽히는지를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SF 소설이라고 과학에만 치중하다가 정작 소설이라는 장르적으로 더 근원적인 면모를 놓친다면 매력이 사라져 버릴 게 분명하다. 《천 개의 파랑》은 비록 ‘과학’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꿋꿋하게 문학을 완성시켰기 때문에 ‘과학’도 살아났다고 본다.
휴머노이드가 보편화된 가까운 미래가 소설의 배경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배경을 아주 확대하지 않고, 경마장의 기수로 사용되는 휴머노이드에 집중한다. 잠깐 편의점의 알바생으로 쓰이는 휴머노이드도 등장하고, 위험한 화재 현장에 투입되는 휴머노이드도 등장시키지만 소설에서 스쳐갈 뿐이다(전개상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그 휴머노이드가 실수로 인간의 감정을 ‘약간’ 가지게 되었을 때를 가정한다. 바로 C-27, 콜리다. 쓰다가 용도가 다 하면 버려지는 휴머노이드의 삶(삶이랄 수 있을까 싶지만)을 콜리도 그대로 답습할 뻔했지만, 그(녀)에게는 연재가 있었다. 그리고 콜리와 감정 교류를 한, 그리고 그 잘못 만들어진 휴머노이드를 매개로 이어지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소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정 없이 만들어져야 했던, 그러나 실수가 감정을 가지게 되어버린 한, 폐기처분 직전의 휴머노이드를 매개로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과학이 많은 것을 대신하지만, 결국 인간성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보다 의미있게 만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또 실제를 그럴 수 있는 분야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지 못하며, 그런 세상에서 불평등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날 지도 미리 헤아려볼 수 있게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비록 소아마비라는 설정은 21세기에 상상하기에는 다소 진부한 면이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인물은, 의외로 지수다. 지수는 가장 솔직하고, 감정을 가장 많이 드러내며, 속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연재 때문에 나름 마음고생을 한다. 이 소설에서 지수의 밝음이 없었다면 너무 우중충한 소설이 되어 내내 울적했을 것이다. 조연의 진짜 가치랄까?
천선란은 휴머노이드, 혹은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휴머노이드와 함께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물론 소설 속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 위로하며 스스로 사람임을 깨달아간다. 과학과 문학이 행복하게 만난 예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