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엽, 《단어가 품은 세계》
정확히 비례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휘력은 한 사람의 지적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일 될 때가 많다. (우리말이든 외국어이든) 단어의 뜻을 알고, 그것이 어떻게 의미가 변화해 왔는가를 아는 것은 인류의 사유가 형성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말이 변해온 과정을 알아가는 것은 흥미롭고 재밌는 공부다.
황선엽 교수의 《단어가 품은 세계》는 우리말에서 단어의 형태와 의미가 변해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서문 첫 문장에서부터 ’단어의 뿌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단어의 뿌리만이 아니라, 뿌리에서 잎사귀 끝까지 다다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에서 현재로 다가가기도 하고,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기도 하면서 우리말의 다채로운 변화 과정, 그 의미가 변해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격적인 학술서가 아니라 몇 가지 단어를 추적하면서 우리가 오해해온 것들을 바로잡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을 알려줌으로써 우리의 언어 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하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 삶을 조금이라도 풍요롭게 만들고자 한다.
그래도 이런 부류의 책을 읽으면서, 혹은 다른 류의 책에서도 언급해서 알고 있는 것들을(이를테면, ’얼룩백이 황소‘나 ’갈매기살‘과 같은 것) 제외하고서라도 새로 알게 된 것들이 참 많다. 몇 가지만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양치질에 관한 얘기다. 굳이 깊게 생각해본 기억은 없지만, 그냥 생각해봐도 양치질의 ’양‘이 양복과 같은 단어에서 쓰는 ’양‘과 같이 서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게 실은 양지(楊枝), 즉 나무로 만든 이쑤시개에서 왔다는 것이다. 특히 버드나무가지(’양(楊)‘이 버드나무를 뜻한다)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게 양치질로 변했는데, 여기의 ’치‘를 ’치(齒)‘로 혼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것으로는 강아지나 송아지, 망아지와 같은 개, 소, 말의 새끼를 가리키는 말이 있는데, 돼지나 고양이에는 왜 없을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저자는 돼지나 고양이가 원래 새끼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란다. 성체 돼지, 고양이는 원래 ’돝‘, ’괴‘이었다고 한다. 이 말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윷놀이에서 ’도‘라든가, 글씨를 ’개발괴발‘(지금은 개발새발이라는 표현을 더 흔하게 쓰지만) 쓴다는 표현 등에서.
김유정의 ’동백꽃‘이 실은 생강나무꽃이라는 것(왜 김유정의 고향이 강원도이고, 강원도에는 우리가 아는 그 동백꽃이 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일본의 동백꽃을 부르는 말이 전혀 다르다는 것과 동백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 우리나라의 해당화와 중국의 해당화가 다른 것을 가리킨다는 것 등등도 처음 알게 된 것들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보게 되는 내용 중에는 일본어를 우리말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어떤 경우에는 성공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실패했던 사례가 있다. 이를테면, 스시 같은 말은 (물론 그 말을 지금도 쓰긴 하지만) (생선)회로 바뀌었지만, ’돈가스‘를 ’저육카틀리트‘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실패했다(물론 지금은 오히려 커틀릿이라고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뎅은 여전히 오뎅이고, 우동은 우동이지만, 요지는 이쑤시개로 바뀌었고, 뎀뿌라는 튀김으로 바뀌었다. 어떤 것은 바뀌지 않고, 어떤 것은 바뀌는 데에 대한 논리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국어학자는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뒤쫓으며 확인하는 사람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황선엽 교수는 단어의 뜻이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시대마다 단어를 어떻게 썼는지, 그 단어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는지를 통해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늘 쉽지만은 않다는 것은, 책에서 자주 ’조심스럽게 유추‘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가치있는 과정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