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레인 대스턴, 《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것을 규칙(rules)이라고 한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모든 상황에서 규칙의 그물망에 얽혀 살아간다. 그렇게 보면 규칙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심지어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규칙도 그렇다). 보편적인 규칙마저도 모든 지역, 모든 계급, 모든 상황에서 획일적이지 않다.
우리가 규칙(rules)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렴풋이 그렇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 로레인 대스턴은 규칙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측정 및 계산의 도구(즉, 알고리즘)’, ‘모델 혹은 패러다임’, ‘법’. 대스턴이 말하길 “규칙의 역사란 이 세 가지 의미의 범주가 확산되고 연결되는 역사”다. 수도원의 규칙에서부터 요리책, 계산 알고리즘(처음에는 사람이, 지금은 기계가 수행하는), 법률 조항 등 규칙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부터 규칙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던 것까지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규칙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세 가지 의미의 규칙 구분과 더불어 저자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두꺼운 규칙’, ‘얇은 규칙’이다. 두꺼운 규칙은 예시, 경고, 관찰, 예외로 뒤덮여 있는 규칙을 말한다. 즉, 다양한 상황 변화에 적용되는 규칙으로 가변성에 대해 예견하고 있는 규칙이다. 반면 얇은 규칙이란 엄격하게 적용되는 규칙을 말한다. 일반적이지 않거나 다양한 사례를 다루도록 설계되지 않은 규칙이다. 모델에 가까운 규칙은 대체로 두껍고, 알고리즘은 얇은 형식을 지니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규칙이든 완전히 두껍고, 완전히 얇지 ‘않았다’. 왜 따옴표를 써서 과거형을 썼냐면, 컴퓨터 알고리즘에서 보듯이 최근의 규칙은 재량권을 박탈하는 얇은 규칙인 경우가 등장했으며, 다른 규칙에서도 그런 경향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 우리는 모두 알고리즘 제국의 신민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대스턴은 세 가지 규칙에 관해 역사적 예를 통해 규칙이 두꺼워지고, 얇아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깔려 있는 철학적 함의, 사회적 배경과 영향 등을 설명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대스턴이 제시하고 있는 예들은 낯이 익은 듯하면서도 낯설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란 의미에서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성 베네딕토 규칙서》다. 수도원의 규칙이라 매우 까다롭고, 매우 상세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다. 수도원장의 재량이 무척이나 많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것에서 수도원장이 판단해서 예외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수행적 재량 없는 인지적 재량은 무력하고, 인지적 재량 없는 수행적 재량은 자의적이다.”란 말로 당시 수도원장의 재량권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유머도 들어 있다). 현대의 재량권이라는 것은 규칙에 따른 극히 예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지만, 당시 수도원장의 재량은 규칙의 일부였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규칙의 역사에서 흐름이기도 하다.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아마도 <6장 규칙과 규정>이 아닐까 싶다. 법(law), 규칙(rule), 규정(regulation)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규정에 대한 장이다.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역사에서 규정의 수가 증가했는데, 그 변화를 세 가지로 정리하고, 그 세 가지와 관련된 예를 아주 상세히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 변화이다. 이 변화에 대응한 규정은 ‘사치금지법’이다. 두 번째는 도시가 커지면서 오래된 거리와 위생 관련 기반시설의 부담이 증가해진 변화다. 이에 대해서는 ‘교통 및 위생 규정이다. 세 번째는 민족국가의 정치적 통합의 흐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맞춤법 개혁‘이 있었다. 사치금지법은 계속 실패하면서도 끊임없이 강제하려 했고, 도시(특히, 파리의 예를 들고 있다)의 개혁과 관련해서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맞춤법(역사 얘기에서 맞춤법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은 예상치 못하게 ’너무 잘 성공한 규칙‘이 되었다(과거의 규칙을 변경하려는 시도에 대해 격렬하게 시위를 할 정도로).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장에서 몇 가지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규칙이라고 해서 모호성이나 해석의 여지가 없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계몽주의 시대 파리가 (마치 지금처럼) 단지 길을 건너는 데에도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지저분하고 악취 나고 사람들로 붐비는 혼란의 상태” 반면, “근대 초기의 암스테르담은 안전만이 아니라 복지와 질서를 보장한다는 넓은 의미에서 모범적인 치안으로 방문객의 찬사를 받고는 했다. 청결, 잘 정돈되고 균일한 도시 외관, 효율적인 하수 체계, 넓은 광장, 석유등이 밝히는 야간 가로등, 엄격히 질서 잡힌 교통 흐름, 걸인을 눈에 띄지 않게 수용하는 작업장 등”
“enuff는 충분하고, enough는 과하다”, “나는 laugh라는 철자를 비웃는다(laff)” (2010년 철자법에 대한 완고한 고수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외친 구호)
“1871년 독일의 경우처럼 시대에 뒤쳐져 있다가 발작적으로 국가를 세운 지역”, “미국의 구호인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는 연방 법률이 아닌 《웹스터 사전》에서 처음으로 달성되었다.” (저자의 유머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문장이 꽤 있다. 예상외로)
그렇다면 저자는 이 규칙이라는 우리(주로는 서양)가 만들어온, 혼란스러운 세계 속 질서의 역사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역사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겠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규칙에 현대적 대응에 대한 아쉬움이지 않을까 싶다.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인간은 규칙을 통해서 안정성을 추구해왔고, 그 경향은 부침이 있었지만 점점 증가해왔다. 그 결과는 컴퓨터 알고리즘에서 보듯이 재량권의 박탈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그런 경향을 부추길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무언가 확실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뭔가 구린 것이 있다고 여긴다(직관, 본능, 영감이 지배하는 암흑의 영역, 불공평하고 비이성적, 부패의 표면적인 증거). 하지만 저자는 규칙에서 모호함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자고 한다. 재량과 주관성, 유추 등은 규칙에 내재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규칙은 재량과 판단, 유추 없이는 적용될 수 없다.” 말하자면 추론하는 인간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규칙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