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준, 김현우, 박재용 외, 《경계》
최초에 지구상에 생물이 생겨난 이래 생물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그게 의식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건 생명의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그 도전이 이루어지는 곳은 이미 성공이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 성공한 생물들은 거들떠 보지 않는 곳, 바로 경계였다. 성공의 대열에서 비껴나갈 위험에 처한 생물들은 경계를 탐했고, 새로운 기회를 엿보았고, 그 결과가 진화였다. 현재 지구의 생명체들이 바로 그 결과이기도 하다.
생명이 시작된 것은 바닷속이었다. 이른바 해수열수구라고 하는 것에서 생명은 배태되었고, 오랫동안 바닷속에서 생명은 번성했다. 그러다 물 속에서 배제의 위기에 처한 생물이 뭍을 기회의 장소로 삼았다. 더듬더듬 육지에 상륙한 식물은 잎을 만들기 시작했고, 큐티클층을 만들기 시작했고, 꽃을 만들기 시작했고, 중복수정이라는 놀라운 메커니즘을 개발해냈다. 선태식물에서, 양치식물로, 겉씨식물로, 그리고 속씨식물로의 진화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식물이 뭍으로 오르자, 동물들도 뭍을 엿보기 시작했다. 역시 그 동물들 역시 물 속에서 배제의 위기에 처했던 생명들이었다. 조그만 벌레가 뭍으로 오르기 시작했고, 척추동물의 조상(사지형어류)이 육상과 물에서 함께 번갈아 생활하기 시작했다. 양서류가 등장했고, 결국은 바다를 막 안에 가둔, 양막척추동물이 지구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렇게 동물들은 육상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육상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동물들이 있었고, 그들이 찾은 곳은 어쩔 수 없이 바다였다. 지금은 멸종된 바다파충류가 있었고, 거북이 바다에서 진화했고, 바다뱀이 있다. 그리고 신생대의 제왕으로 재탄생한 고래가 있었고, 아직도 진화 중인 것으로 보이는 물개가 있다. 그들은 비록 육상에서 밀려났지만, 바다에서 새로운 번성의 기회를 찾았던 것이다.
바다와 육상, 그리고 다시 바다. 이제 하늘이 있다. 날개는 네 차례 진화했다고 보고 있다. 곤충에서 가장 먼저 진화했고, 척추동물 중 최초로 동력 비행을 한 익룡이 있었고, 공룡의 후예인 새가 있고, 그리고 박쥐가 있다. 그것들이 하늘이라는 새로운 경계를 찾기 위해서는 엄청난 변형이 이뤄져야 했다. 깃털이나 날개를 움직여야 하는 근육 말고도 뼈를 비워야 했고, 새로운 호흡 기제인 기낭을 만들어야 했다. 박쥐의 경우는 반향정위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내야 했다. 진화는 쉬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경계를 넘는 것은 더더욱.
이제 남은 곳이 있을까? 있다. 바로 땅 속. 땅 속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생물들 역시 배제의 위험에 처해 있던 생물들이었다. 지렁이, 무족영원, 뱀, 그리고 두더지. 사실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많은 동물들이 땅 속에서 자신들의 진화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이제 인간이 남았다.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하게 된 계기 역시 생존의 위험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험을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역사상 어느 생물도 차지하지 못했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순식간에 말이다. 종의 존재 자체로 다른 생명체를 멸종에 이르게 하는 최초의 생물이 된 것이다. 스스로 경계를 뚫어버린 최초의 생물.
ESB 다큐프라임 <생명, 40억 년의 비밀> 팀이 쓴 시리즈 중 하나인 《경계》는 생명의 역사가 도전의 연속이었음을, 그리고 그 진화의 찬란한 역사가 경계에서 이뤄졌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전공자들이 아닌 입장에서 매우 꼼꼼하게 조사하고, 어렵지 않게 풀어썼다. 아쉬움이라면 너무 학명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이 많은 것을 밝힌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소개를 해줬으면 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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