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노동하는 작가 한승태(이게 특별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작가는 어떤 형태로든 노동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승태에게는 ‘노동하는 작가’란 타이틀이 의미가 있다)는 인공지능 시대에 사라질 직업, 정확히는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을 체험하기로 한다. 사실 여기서 ‘체험’이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그는 진짜 생계를 위해서 그 직업을 고른 것이니 말이다. 단, 그걸 글로 연결시킬 생각을 미리 하고 있었을 뿐. 그는 네 가지 직종을 골랐다.
콜센터(전화받다), 물류센터(운반하다), 음식점(요리하다), 건물미화원(청소하다)가 그것들인데, 작가의 표현으로는 ‘대체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인 직업 중에서 가능한 한 평범하고 역사가 오래된 직업’이다.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또 달리 보면 특별한 직종들이다. 이 일들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누구도 이 일을 희망 사항이라 적지는 않을 거라는 점에서 그렇고, 대체로는 그런 일을 한다고 내세우지도 않을 것라는 점에서도, 그렇다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작가 한승태는 그야말로 빡세게 일한다. 새로 일을 배운다. 모든 일은 배워야 한다. 전화를 받고, 운반하고, 요리하고, 청소하는 일은 모두가 평소에 하는 일이지만, 그것으로 돈을 받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게다가 처음에는, 그리고 한동안은 어떻게 그런 것도 못하느냐며 구박받으며 멸시를 당해야 겨우겨우 자기 몫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일’이란 건 그런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모두가 시작은 어떤 기술을 가졌다고 해서 시작하는 일이 아니다) 쉬운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인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넣어야 겨우 쫓아갈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작가는 ‘늘’ 겪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 자신의 모든 것이란, 어떤 경우에는 체력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다. 체력을 써야 하는 일에서도 정신적인 모멸감을 느끼며 버텨내야 하고, 정신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일에서도 버텨내는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해야 우리 정부에서 정한 최저 시급을 겨우 받아낼 수가 있다.
한승태의 글은 분명 유머가 넘친다. 문장 하나를 떼어내서 읽어보고, 비유를 하나하나 뜯어내 생각해보면 냉소적이면서도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 그런데 전혀 우습지가 않다. 극한에 처한 상황에서 나오는 유머는 비장하다. 늘 검출 안 되는 독약을 검색한다는 유머가 우스울 리는 없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주류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이 지지고 볶으면서 서로 질투하고, 서로 시기하고, 혼내고, 혼나고, 그리고 가끔 도우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애절하다. 그게 특유의 비유에 섞이니 문장들이 슬프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이 직업들이 정말로 조만간 대체될까? 우리가 지나간 흔적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새에 치워주는 일이, 우리가 전화로, 인터넷으로 TV에서 주문한 물품이 때 맞춰 문앞에 도달하도록 분류하고 나르는 일이, 그러나 문제가 생긴 일을 들어주고 처리해주는 일이,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일이? 오히려 마무리에 정말로 자기 비하의 끝판왕처럼 써내려간 ‘쓰다’의 주체, 즉 작가가, 그리고 나같이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더 빨리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이 말도 어폐가 있다. 어디 보이지 않는 곳이 있으랴. 그저 보지 않으려는 것일 뿐), 바닥에서 반복적으로(실은 그 반복도 반복이 아니더라) 몸을 쓰고, 감정을 받아내는 일이 쉽게 사라질 것 같은가.
책은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어쩌면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을, 어떻게든 버텨낼 직업들의 슬픈 일기장 같아 보인다. 그리고 사라지는 직업들을 다루었지만, 그게 미래학자나 사회학자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 아주아주 감성적인 작가도 그 일에 대해서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작가도 사라져서는 안되는 직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이.